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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1991년 '지리산 결사대' 사건의 진상

기록하는 사람 2013. 4. 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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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8월 20일 <경남도민일보>에 '10년만에 다시 쓰는 취재기'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한국언론의 가장 추악한 오보로 기록된 만한 사건에 대해 바로잡는 취지에서 썼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는 1991년 경상대 ‘지리산결사대 사건’으로 실형을 살았던 빈지태씨(34.당시 경상대 경제학과)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했다. 10년전 ‘빨치산과 일본 적군파를 모방한 극렬운동권의 소수 전위부대’라는 딱지를 선사받았던 이 사건이 10년만에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게 된 사연은 무었일까. 당시 지역주간지 기자로 유일하게 현장에 있었던 기자의 취재기를 통해 이 사건의 진상을 알아본다.


1991년 10월 10일 오후 4시 30분쯤이었다. 기자가 급히 택시에서 내려 진주시 하대동 진주전문대(이후 문산읍으로 이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40여명의 경상대생들이 C동 101호 강의실에서 꿇어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에 앞서 기자는 진주전문대 총학생회장 선거를 앞두고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을 몇일 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맞붙게 된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과정에서 주로 여학생들로 구성된 운동권측 선거운동원들이 상대측 운동원들로부터 숱한 폭언과 협박에 시달려왔던 것. 이에 따라 운동권측 선거운동원들은 “강간을 해버리겠다”“너희가 선거에 이기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공공연한 협박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거분위기는 줄곧 운동권측에 유리하게 진행됐고, 이날 투· 개표가 끝날 4시쯤에는 운동권측의 당선이 거의 확정적이었다.(실제로 이날 투표결과 200여표차로 운동권 후보인 천재동(당시 24세)씨가 당선됐다.)


이같은 상황을 예감하고 있던 기자는 4시쯤 진주전문대에 전화를 걸었다. 평소 취재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교지편집위원회나 학보사를 바꿔달라고 했더니 교환원이 머뭇거리며 “지금 통화가 안될 겁니다”고 하는 것이었다. 퍼뜩 스치는 게 있어 “싸움이 났죠?”하고 넘겨짚었더니 그렇다는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이 학교로 가는 동안 기자는 흔히 일어나는 투표함 탈취 등 개표방해사건을 연상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본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강의실 바깥에는 수많은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몰려와 있었고, 강의실 안에서는 각목을 든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비운동권 후보측)이 기세등등한 자세로 꿇어앉은 경상대생들의 ‘군기(?)’를 잡고 있었다. 고개를 들거나 자세가 흐트러질 경우 거침없이 발길질과 각목세례가 가해졌다.


이런 와중에 누가 연락을 했는지 후문 담장 바깥엔 경찰의 ‘닭장차’가 도착했다. 이 학교 교수· 학생들과 경찰이 모종의 협상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강의실에 ‘감금’당해있던 경상대 학생들이 예의 각목을 든 청년들의 감시를 받으며 머리에 양손을 올린 채 ‘오리걸음’으로 줄줄이 끌려 나왔다.


기자는 보기드문 이 광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열심히 눌렀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던 중 누군가가 “저새끼 뭐야”하고 고함을 질렀다. 순식간에 건장한 학생 10여명이 거친 욕설을 하며 기자를 에워쌌다.


“너 누구 허락받고 사진찍는거야.”

“취재기자인데요.”

“이새끼 지랄하고 있네. 죽으려고 환장했구만.”


순간 누군가가 카메라를 휙 나꿔챘다. 기자는 죽을 힘을 다해 카메라 어깨끈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한꺼번에 달려드는 청년들의 완강한 힘에 도리없이 카메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학생이 담벼락을 향해 카메라를 힘껏 던지려던 찰라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 학교 교수가 달려와 학생을 만류했다. 그는 흥분한 학생을 설득한 끝에 필름을 꺼내 학생에게 넘겨준 후 빈 카메라만 기자에게 돌려줬다.


이 과정에서 끌려나온 경상대생들은 후문 담장 바깥에서 대기중이던 ‘닭장차’에 고스란히 인계됐다. 이렇게 연행된 학생은 33명.


상황이 종료된 후 기자는 처음부터 현장을 목격한 학생들을 상대로 취재를 시작했다.


선거 하루 전인 9일 진주전문대 선거유세 과정에서 양측 후보 지지자들간에 욕설과 폭언 등 다툼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진주·충무지역총학생회협의회(진충총협· 의장 이일균 경상대총학생회장)에 접수됐다.


이튿날인 10일 오전 진충총협은 이 학교 선거개표 후 폭력사태가 예상된다며 급히 경상대에서 사수대를 모집, 40여명을 진주전문대에 파견했다. 40여명의 경상대생들은 이날 오후 3시30분께 진주전문대에 도착, 개표장과 떨어진 강의실에서 이 학교 학보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4시께 운동권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정될 무렵, 갑자기 강의실 유리창이 깨지면서 앞문과 뒷문으로 15명 가량의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경상대생 중 한명이 비닐봉지에 싼 최루가루를 뿌렸고, 몇몇 학생이 강의실 밖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바깥에 있던 수많은 진주전문대생에게 포위당해 이들 역시 제대로 저항도 못해본 채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경상대생들은 천막가방 속에 넣어 간 쇠파이프를 미처 꺼낼 사이도 없이 모두 빼앗겼으며, 각목과 책상, 빼앗긴 쇠파이프 등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완전히 제압당한 경상대생들은 강의실에 꿇어앉은 채 진주전문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이 학교에 들어온 경위 등에 대한 진술서를 썼다. 이 진술서와 쇠파이프· 최루탄 등은 모두 ‘증거품’으로 경찰에 인수인계됐다.


당시 기자는 재직중이던 <남강신문>(이후 진주신문으로 통합)을 통해 ‘언론보도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진주전문대 사태에 대한 보도를 보고’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의 진상을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일간지는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지리산결사대' 사건 당시 언론의 왜곡보도 살펴보니


기자가 현장에서 목격한 바와 같이 이 사건은 운동권 후보의 신변보호를 위해 진주전문대에 들어가 대기중이던 경상대생들이 오히려 비운동권측 지지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다. 따라서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경상대생들은 피해자쪽에 가깝다. 물론 이들이 쇠파이프와 불발최루탄 등 무기를 소지하고 남의 학교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폭력혐의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쌍방폭행이 돼야 옳다.


그러나 경찰의 발표는 전혀 달랐다.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보도한 <동아일보> 11일자 사회면 기사를 보자.


“10일 오후 5시반경 진주시 하대동 진주전문대 201호 강의실에서 진행된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개표장에 경상대 써클인 지리산결사대 소속 유형민군(19.경상대 무역과 1년) 등 대학생 33명이 쇠파이프와 최루탄을 갖고 들어가 20여분동안 난동을 부렸다. 경상대생들은 진주전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 후보인 천재동군(19.전자계산과 1년)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 강의실 유리창 2장을 깨고 들어가 최루탄 1발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 기사는 짧은 2개의 문장 대부분이 오보로 구성돼 있다. 사실보도의 구성요소를 6하원칙이라고 할 때 이중 사실과 부합되는 것은 단 한가지도 없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언제(when)에 해당하는 ‘오후 5시반경’이 틀렸다. 학생들간에 충돌이 일어난 시간은 오후 4시께였다. 또 어디서(where)에 해당하는 장소도 틀렸다. 경상대생들은 개표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개표장과 다른 101호 강의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누가(who)에 해당하는 난동과 폭력을 주체도 오히려 뒤바뀌었다. 무엇을(what), 어떻게(how)에 해당하는 행위도 잘못된 것이다. 주체가 바뀌었으니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두른 행위도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다. 이유를 설명하는 왜(why)도 마찬가지다. 기사는 ‘운동권후보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심지어 천재동 후보의 나이도 안맞다. 그는 1학년이었으나 늦깍이 입학으로 실제나이는 24세였다.


이처럼 사실관계에서 오보투성이인 기사가 당시 모든 언론에 그대로 보도됐다. 조선.동아.중앙 등 전국일간지의 경우 취재기자가 진주에 없어 일방적인 경찰발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현지에 많은 취재기자를 두고 있는 지역일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신경남일보><경남신문><경남매일> 등 3개 지역일간지도 모두 경찰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 뒤였다. 당시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언론노보 10월 21일자는 이렇게 폭로하고 있다.


“문제가 된 것은 14일. 이날 진주경찰서는 ‘지리산결사대’ 관련 보도자료를 진주 및 경남도경 기자실에 보냈다. 첫 보도때 이미 단추를 잘못 끼운 연합통신 진주주재기자가 또다시 확인없이 경찰측 보도자료를 그대로 기사화해 본사로 송고했다.(…중략…) 이날 오후부터 서울에 있는 지방담당데스크들이 일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연통기사를 서비스받은 이들은 ‘이렇게 좋은 재료를 왜 안보냈느냐’는 투의 전화를 해당지역에 했다. 이에 따라 경남주재 중앙지 기자들은 별다른 확인과정없이 경찰측 보도자료를 근거로 첫 보도겸 ‘결사대’ 속보를 작성해 본사로 송고했다.”


이에 따라 전국일간지와 양 방송사 등은 ‘폭력투쟁 앞세운 운동권 전위 / 경찰이 밝힌 ‘지리산결사대’ 정체’ ‘극렬.소수화 운동권의 전위대 / 경상대 ‘지리산결사대’의 정체’ 등 특집 해설기사 등을 일제히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같은 언론의 앵무새같은 보도에 힘입어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은 이들 경상대생 18명에게 대부분 폭력혐의를 인정, 유죄선고를 내렸다. 물론 진주전문대 학생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모두 19명 기소돼 유죄판결...6명은 실형


10년 전 노태우 정권 당시 학생운동 탄압을 위해 확대.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지목되고 있는 ‘지리산결사대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당시 이 사건으로 구속기소돼 실형을 받았던 빈지태씨(34.당시 경상대 경제학과)가 최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인정 통보를 받은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경상대 민주동문회(회장 이영주) 등 관련단체와 당시 학생들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킨 것은 물론 학생운동권을 빨갱이로 덧칠하고 무시무시한 폭력집단으로 매도한 이 사건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지리산결사대 사건’은 지난 91년 10월 10일 진주전문대 총학생회장 선거와 관련, 이 학교 운동권 후보측의 신변보호 요청에 따라 강의실에서 대기중이던 진주.충무지역총학생회협의회(진충총협) 소속 경상대 학생 40여명이 비운동권 후보측 학생들에 의해 경찰에 인계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경상대 학생들은 진주전문대의 특정후보측 학생들로부터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반면, 경찰은 오히려 이들 운동권 학생을 ‘타 학교에 난입, 난동을 부리고 폭력을 행사했다’며 폭력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에 따라 당시 19명이 기소돼 이중 6명이 1년~3년8개월의 실형을 받았으며, 나머지 13명도 집행유예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및 일부 지역일간지는 경찰의 일방적인 발표를 그대로 보도하면서 ‘빨치산의 후예를 자처하는 학생들이 대대.소대.분대 등 군대조직을 갖춰 지리산에서 화염병투척훈련을 해왔다’며 이를 용공이적단체로 매도했으며, 난입.난동.폭행혐의에 대한 확인취재도 전혀 하지 않아 언론계 내부에서마저 ‘발표저널리즘에 따른 대표적 오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현재 함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빈지태씨는 “조선.동아일보 등 주요언론에서 우리를 비밀폭력조직이나 이적단체로 매도하는 바람에 한동안 경상대생 전체가 취업에 큰 불이익을 받았으며, 전국 모든 대학의 사수대가 폭력조직으로 된서리를 맞았다”면서 “이 문제는 한 개인의 명예나 보상의 차원이 아니라 당시 경상대와 한국 학생운동의 명예회복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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