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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국전쟁 때 노근리사건이나 보도연맹 사건과 같은 민간인학살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와 여러 사회단체의 노력으로 상당수 실체가 드러나 있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의 지도감독을 받았던 준군사조직이었던 청년방위대원들이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처형된 사례는 밝혀진 게 없었다. 어쩌면 학살의 가해자 쪽으로 분류될 수도 있었던 청년방위대원들이 피학살됐던 사연은 뭘까.

이 사례를 처음으로 발굴한 충북역사문화연대 김순애 교육부장의 취재기를 공개한다. 이 글을 계기로 기성언론들의 보충취재와 보도도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내가 녹음기와 캠코더를 들고 싸돌아다니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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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거의 매일 충북 영동에 간다. 이렇게 싸돌아다니는 게 나의 직업이다.

날이 더워져서 에어컨 안 나오는 마티즈 타고 고속도로를 탈 때면 조금 괴롭다. 그러나 영동만 들어서면, 울창한 산과 강과 바람 덕에 더위를 모른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놈이 촌스럽다며, 안 들겠다고 팽개쳐, 내 차지가 된 멜빵가방엔 디카와 녹음기, 수첩과 자료로 비좁다. 그리고 어깨엔 캠코더와 삼발이를 맨다.

왜 이렇게 준비물이 많냐구? 나의 출장은 옛이야기를 묻고 찍고 기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채록하는 이야기는 먼 일제 때부터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다.

마을에서 어르신을 만나면, 꾸뻑 인사한다. 그리고 “할아버지, 전쟁 때 여기에서 보도연맹원으로 죽은 사람이 있나요?”하면, “그건 왜 물어?”하고 의심스레 쳐다본다. “예,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분들 명예회복 시켜 드리려구요”하면, 그제서야 “그때 하도대리에서 많이 죽었지. 그 상황을 잘 알려면 남○○ 찾아가 봐”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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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똥을 맘껐 따먹게 해준 할머니(남우현의 처)

한 여름에도 물이 차갑다는 물한리계곡을 좌측으로 끼고 하도대리 본동 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에서 83년간을 살았다는 남우현 할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 찾아간 날은 할아버지가 들에 나가셨다. 이틀 후 다시 찾아가니, 이번엔 황간향교에 가셨단다.

“아이구 뵙기 힘드네요”하니, 할머니가 “보리똥하고 앵두 좀 따먹고 가”하신다. ‘에이 보리똥으로 배나 채우자’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많이’ 따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오셨다.

최초발굴 : 영동군 청년방위대원이 집단 처형된 사연

“어쩐 일이래요?”, “예. 6.25때 마을역사를 알려구요”하니, 전쟁 나기 전 '청년방위대'에 근무했던 일부터 입이 열렸다. “상촌국민학교에서 약 40~50명이 한 달간 훈련을 받았는데, 하루는 영동읍에 신무기교육을 받으러 간다구 20명을 차출하더라구.”

그런데 놀라운 이야기가 나왔다. 경산으로 간 20명 청년방위대원 중 10여명 국민보도연맹원이 경산코발트광산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 9명이 하도대리 청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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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상촌면 청년방위대 사무실 터에서(증언자 남우현과 충북역사문화연대 운영위원장 박만순)

이제까지 영동지역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20일 영동읍 어서실, 석쟁이재와 상촌면 상도대리와 고자리에서 300명 가량이 처형되었다고 알려져 왔었다. 그런데 어떻게 상촌면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산코발트 광산에까지 끌려가서 집단처형 되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청년방위대는 대한청년단이라는 단체에서 시작됐지만, 전쟁 때는 국방부의 지도감독을 받는 준군사조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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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증언하는 남우현 할아버지.

이 궁금증은 남우현 할아버지의 3시간에 걸친 증언과 관련 비문에 대한 현장 안내를 통해 해소될 수 있었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이 함락되고, 영동에는 다음날인 7월 21일 소개령이 내려졌어. 아내와 노부모를 남겨 논 채 마을 청년 11명이 피난증을 가지고 피난을 갔어. (영동군)매곡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에는 경북 김천가서 잤지.

그러다가 경북 경산을 가게 됐는데 아는 사람의 연고로, 코발트광산의 여관에 묵게 됐어. 하루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지에무씨(GMC)에 사람을 가득 싣고, 어디론가 달려. 트럭 네 귀퉁이에는 한사람씩 앉아있고 말여. 한시간을 앉아 있는 동안 40대가 지나가. 그런데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그러는 겨. 나중에는 노인도 실려 있더라고. 근데 그때는 트럭에 실린 사람이 누구고 어디로 가는 지 몰랐지.”

이들이 보도연맹원들이고, 영동군 청년방위대원 중 보도연맹원들이 끼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경산국민학교에 영동군 청년방위대원들이 있다는 겨. 그래서 마을 친구들도 볼 겸 갔지. 마침 정문초소에 친구가 있더라고. 그런데 경산국민학교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어.”

그러다 남우현씨는 방위군 장교 박홍기를 만났다. 박홍기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경산초등학교 운동장에 청년방위대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장부책을 놓고 하는 말이 ‘보도도연맹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눈감고 손들어’하데.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서 나가니까 교실로 데리고 갔어. 이들을 코발트광산으로 끌고 가 전부 처형했지. 내가 미리 내막을 알았더라면 동네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해서 상촌면 하도대리에서만 9명의 꽃다운 청년들이 코발트광산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학살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남승길(본동), 남칠현(본동), 남호현(본동), 이병덕(본동), 남응현(본동), 송정호(신기), 남승만(신기), 김창은(신기), 남종(소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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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랑비 측면의 국가유공자 명단.

그런데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 하도대리 마을자랑비에 국가유공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마을의 유래와 열녀를 소개한 마을자랑비 옆면에는 한국전쟁기 국가유공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비석에 9명의 코발트광산 희생자 명단이 섞여서 실려 있는 것이다.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순애(충북역사문화연대 교육부장)

용화면 청년방위대 인솔자 강태석 소대장의 고백(녹취록 요약)

증언일시 : 2008년 2월 13일
출생년도 : 1929년.
출 생 지 :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 내룡.

1943년 용화공립심상소학교 졸업했다. 17살 때 해방이 되었다. 용화광산에 있던 라디오를 듣고 해방을 알았다. 해방 후 용화에는 대동청년단이 있었다. 나도 대동청년단에 들었다. 단장이름이 정용석이던가 그렇다. 그분은 6.25때 장교로 전사했다. 용화국민학교에 모여서 연설을 들었다. 그때 부락에서 야경을 하고 초소막을 지어 놓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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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석 당시 청년방위대 용화면 소대장.

영동면화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대한청년단 훈련을 받았다. 100명이 넘었다. 면에서 좀 똑똑한 사람을 불러서 훈련을 했다. 그때 김영철이 교관이었다.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중대장은 이경승이었다. 소대장은 김긍식(어디사람인지 모름), 흘계사람 최양열, 월전리의 이조승, 용화리의 강태석이었다. 소대장이 리별로 다 있어야 하는데, 여건상 자계리와 용강은 정식임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소대장을 했다.

나는 수원 방위사관학교 5기생이다. 그때 동기생은 약 200명 쯤 된다. 양강면의 장시문 장구섭이 동기생이다.

권준대령이 지은 작전요무령을 배우고, 여순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장교들만 보았다. 그 영화는 사병들은 못 보았다. 1달 훈련을 받고, 50.5.31 임관했다. 임관 후 조동소대로 배치되었다. 대원이 조동과 안정리를 합쳐서 50~60명, 자계리 구백이 횡지 여의리 합쳐서 100여명, 용강리가 30명, 월전 흘계리가 50명, 용화 내룡 창골 합쳐서 50명 정도였다. 용화면 전체 청년방위대 대원이 대략 300여명이다.

6.25가 나자 전(全)대원을 용화국민학교에 집합을 시켜서, 이경승 중대장이 65명 지원을 받았다. 영동가서 1주 훈련하고, 완전무장하고, 고향으로 돌아 와 공비토벌하라고 했다. “강소위는 미혼이고, 혼자니까 거리낌이 없다. 적임자다. 훈련받고 이런 일을 하라”고 했다. 22살 때인데 무서운 줄을 모르고 하겠다고 했다.

7월 15일쯤에 영동에 나왔다. 도보로 영동에 나와 보니까 현역연대였다. 영동에서 1주일 정도 있었다. 5신병교육대 몇 중대에 편성이 되었다. 대장이 이대영 중령이었다. 무주사람과 영동사람 혼성팀이었다. 2-3일 수류탄 투척 각계전투 훈련을 하다보니까, 심천방향에서 불이 환하게 올라갔다.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대포가 올라가는 거라고 했다.

5~6살 더 먹은 선배들이 저녁마다 어디 갔다 오더니 추레했다. 고문을 받았는데, 보련(국민보도연맹)에 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잡아다가 캐묻는다고 했다. 보도연맹에 들은 사람들 나오라고 할 때, 벌써 신병교육연대에서는 벌써 그 명단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신원조회 해가지고 고향으로 쫓아 버릴 려나 보다’하고 그 사람들이 그때 이름 써서 냈다. 집으로 보낼 줄 알고 “같이 가자, 가자”하며 들었다. 그 사람들이 5신병교육대 연대본부에 가서 고문을 받았다. 5신병교육대 연대본부는 영동농협 맞은편에  일본사람이 살던 2층 목조집이었다.

숙소는 중국사람 천성태씨 집이었다. 거기 비어 있는 집에 가서 숙식을 했다. 방이 교실만큼 컸다.
 며칠 후 밤에 10시 넘어서 정거장으로 인솔하라고 했다. 인솔 중에 오포대 넘어 영미사진관이라고 있었다. 거기에 미군들이 와 있었다. 미군인데 흑인이 한국말을 했다. 어머니가 한국사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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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코발트 광산 유해발굴 장면.(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짐싣는 차를 타고 2~3시간을 지나 한 12시가 넘어서 기차가 떠났다.  심천에서 대포가 올라가는 걸 보고 2-3일 쯤 후에 기차를 탔는데, 7월 20일쯤일 것 같다.  영동역에서 기차에 탄 사람들은 용화면사람 65명과 무주사람이었다. 용화・무주 중대장은 진경준 중대장이었다. 그리고 영동군내 다른 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용화면 사람만 기억하지 다른 면 사람들은 모른다. 날이 샐 때 쯤 보니까 대구 시내를 지나는 중이었다.

한참 있다가 경산에서 내렸다. 경산중앙국민학교로 데리고 갔다. 낮에는 교육 훈련을 했다. 그러다 2~3일 후에 보련에 가입한 사람들을 전부 빼내서, 6중대라고 새로 중대를 편성을 해서 강당에 집어넣었다. 머리를 빡빡 깎아서 집어넣었다. 강당에 넣은 지 5~6일, 근 일주일 있었다. 강당에는 한 100여명이 있었다. 용화면 사람은 22명이고 더 있을 수도 있다. 설천면 사람도 두 명이 아는 사람이 있었다.


영동에 있을 때 밤에 고문당하고 추레하게 있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보도연맹으로 불려간 용화면 사람들 22명 이름을 손으로 꼽는다.

안정리 이갑문, 조동리 박태하・정규태・박규성・이남희(이명 이재춘)・양상수・이종관(동창)・강원형(동창)・김삼조(나이 많다), 창골의 장재호(선배)・강영희・이갑봉, 용화의 양도영(동창)・최창덕, 하용강의 김용한, 구백이의 김해봉, 횡지의 김종진, 여의리의 이시영, 흘계의 강낙희, 월전의 임원승・김삼봉・박달준씨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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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된 유해.


그리고 무주군 설천면 사람도 있었다. 기곡리의 퇴일동네에 살던 동창생 박래한과 김옥래가 확실히 6중대에 들어갔다. 양강사람 장시문이 예비군 중대장을 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집에서 죽었다.

경산국민학교에서 6중대를 따로 분류할 때 불길한 마음이 들어, 청방교육대 정보과로 가서 “왜 따로 놓느냐”고 물으니까 육군중령이 “걱정말라”고 했다. 근데 그날로 다 데리고 갔다. 방위장교한테 물으니 “헌병들이 와서, 엮어서, 싣고 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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