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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있는 학자가 대중적 글쓰기도 잘한다면?

역사기록|2009. 2. 2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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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금) 서울대 인문학관에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동계워크샵과 정기총회가 열렸다. 제노사이드연구회란 그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있었던 집단학살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공주대 지수걸 교수와 내가 각각 충북 영동지역과 경남 함양지역의 민간인 집단희생자에 대한 조사 결과와 조사 과정의 소감을 발표했다.


이어진 정기총회에선 지난 3년간 회장을 맡아오신 동아대 홍순권 교수에서 서울대 정근식 교수로 회장이 바뀌었다. 지난해에 이어 내가 감사를 맡게 됐다. 나는 지난해에도 감사였기 때문에 지난해 사업과 예결산에 대한 감사보고를 했는데, 기록차원에서 남겨두자면 다음과 같다.

감사보고서

-제한된 예산 한도 내에서 알뜰하게 살림을 잘 한 것으로 평가되며, 부적절하게 지출된 내역은 발견할 수 없었음.
-오히려 지출내역이 너무 알뜰한 나머지 집행부에서 사업을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음.

-또한 <제노사이드연구> 3호의 경우, 발송비가 2호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것으로 보아 어렵게 발행을 해놓고도 제대로 활용과 배포를 못한 게 아니냐는 걱정이 됨.

-특히 회원관리가 체계적이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회비를 낸 회원은 얼마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남.

-따라서 연구회보 발행과 배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고, 회보 발송과 연계하여 회원들로 하여금 회비 납부를 권유해야 할 것으로 생각됨. 회비 납부는 단순히 재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회원으로서 소속감과 권리의식을 높이는 동시에 활동에 참여하는 동기유발의 차원에서 연구회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하는 필수요소임.

-이를 위해서는 연구회보를 반년간지 또는 계간지로 빠지지 않고 정기발행하겠다는 의지와 적극성이 요구되며, 월 1회 정도의 이메일 뉴스레터를 통해 제노사이드 연구동향을 회원들에게 알려주면 좋겠음.

-또한 이메일 뉴스레터에서는 매달 회비납부 내역과 납부한 회원 명단을 공유하는 것이 좋을것으로 생각됨.

-당장 오늘 총회 자리에서 회비의 액수와 계좌를 공지할 필요도 있음.

정근식 교수

지수걸 교수

홍순권 교수를 바로 찍은 사진이 없었다. 왼쪽의 웃고 있는 분이 홍순권 교수다.


워크샵과 총회를 마친 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대중적 글쓰기'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홍순권, 정근식, 지수걸 교수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처럼 대중적 글쓰기를 하셔서 책을 내 많은 대중들이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교수님들은 "논문 잘 쓰는 사람 따로 있고, 대중서 잘 쓰는 사람 따로 있다"며 "우리는 그쪽에 역량이 안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쉽다. 이들 홍, 정, 지 교수는 역사, 특히 한국현대사 분야에서 특출하신 분들이다. 대중들이 접하기 어려운 논문이나 학술서뿐 아니라 대중적인 역사책들을 내놓으면 왜곡되고 은폐된 근현대사를 바로잡는데 많은 도움이 될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다.

전갑생 회원이 찍어준 사진이다.

중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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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자 되라고 강요하는 사회

역사기록|2008. 11. 3.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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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30·40대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가장 많이 들어온 삶의 지침은 뭘까? 아마도 '모난 돌이 정 맞는다''너무 앞에 나서지 마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우리 어머니는 내가 군에 입대할 때 이런 말씀도 일러 주셨다. "군대에서 줄을 설 땐 무조건 사람이 많은 쪽에 서야 한다더라. 그리고 너무 앞에도 서지 말고, 뒤에도 서지 말고 항상 중간에 서야 한단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친구를 협박할 땐 이런 말을 썼다.

"이 자식 사상이 꼬롬하네? 너 그러다가 정말 '골'로 간다."

요즘도 기자들 사이에선 큰 기사를 낙종했을 때 "물먹었다"는 표현을 쓴다.

'골로간다'와 '물먹었다'

'골로 간다''물먹는다'는 표현이 살육의 현대사에서 비롯된 말임을 알게 된 것은 민간인학살사건을 취재하면서부터였다. 해방 이후 6·25를 전후로 하여 사상이 '꼬롬(?)'한 사람은 모두 골짜기로 끌려가 총살당하거나 바다에 수장된 데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만주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희한하게도 나는 그때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박정희와 김대중이 유력한 후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 담벽에 붙은 선거포스터를 보던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빨갱이 나라가 된다카데?"

"그라모 큰일이네? 우린 이제 죽었다."

그 후 선거일까지 계속 악몽을 꾸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 괴뢰군을 이끌고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마루 밑에 기어 들어가 숨었다.

마침내 선거일이 됐다. 정말 불안했다. 투표를 하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붙들고 물었다.

"아부지. 김대중이가 대통령이 되면 우짭니까? 그 사람 공산당이라 카던데."

"걱정마라. 투표장에서 보니까 대중이 찍는 사람은 전부 찾아내서 다시 찍으라고 하더라. 그 사람은 안될끼다."

과연 그는 떨어졌다. 나는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후 중학생일 때였던가? 겨울밤 가족끼리 안방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얘기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다. 아마 그에 대한 나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때 가족 중 누군가가 갑자기 음성을 낮추며 이렇게 말했다.

"쉿! 조용히 해. 누가 들을라." 그러자 옆에서 모시를 삼고 있던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도 있지."

그때도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벌써 누군가가 들은 것은 아니었을까? 또 악몽에 시달렸다. 경찰이 우릴 잡으러 오는 꿈이었고, 그때마다 마루 밑에 숨어 공포를 달랬다.

5.16쿠데타 거사를 치른 후 박종규(왼쪽), 차지철(오른쪽)과 함께 선 박정희.


초·중학생의 어린 마음에까지 공포를 심어주던 박정희도, '골로 간다''물먹는다'는 말을 만들어낸 이승만도 지금은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됐다. 그러나 그들의 계승자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우리의 의식을 조종하려 하고 있다.

우익은 없다, 기회주의자만 있을뿐!

광복 63년을 맞은 지금,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일제시대 친일 안한 사람이 어디 있나." "삶과 예술작품은 따로 평가해야지."

수십만명의 민간인을 재판도 없이 살육한 국가범죄에 대해서도 그들은 이렇게 강변한다.

"그때 그렇게라도 안 했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빨갱이 세상이 됐을 걸." "그러게 누가 앞에 나서래? 모난 돌이 정 맞은 거지 뭐."

아하! 우리 부모들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셨던 '모난 돌…'은 결국 그 말이었구나. 강자 앞에 대들다간 '골'로 가게 되니 대세에 순응하며 적당히 목숨을 부지하라는 말씀이었구나.

얼마나 공포의 세월을 살아오셨으면 자식에게 '기회주의자가 되라'고 가르치셨을까.

그렇다면 지금 이승만과 박정희의 계승자들은 과연 우익일까, 그냥 머리 좋은 기회주의자에 불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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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돌이 2008.11.03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인데.. 아직도 이놈의 멍청한 국민들은 딴나라당을 뽑아주니... 멍청한 종자들... 500년간 상놈의 자식들이었는데..역시.. 100년이 지나도 종놈의 근성은 없어지지 않는 구나..

    • Favicon of http://ㅇㅇㅇ.ㅇㅇ BlogIcon 하옹 2008.11.04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도 어렸을때 조센징 이런말 싫었는데

      괜히 쪽발이들이 그런말 하는게 아니더라구

      이 민족의 발전성은 없는것 같음

      임란이나 을사조약만 봐도

      뒤통수를 여러번 당했어도

      일본 좋다고 헤헤덕 거리는것 보면

      이 개한민국사회에 대한 증오를 느낌

  2. Favicon of http://ramazzoti@hanmail.net BlogIcon RAMAZZOTI 2008.11.04 0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구상에서 생명력이 가장 강하다는 바퀴벌레가 멸종했음 했지. 딴나라당과 알바들, 친일 분자들은 멸종 안될걸요~

  3. 심하다 2008.11.04 0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만있으면 딴나라당과 알바, 친일이니....

    다른 사람들한테 줏어들은 이야기 되뇌이지 말고 생각좀 하고 사시길....

    똑같은 논리로 당신에게 공산당과 김정일알바들, 빨갱이라고 단정짓는다면 이게 정상으로 보이나요?

    • 2008.11.04 0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치에 대한 제반적 지식을 갖췄다면 저런 말을 안되뇌이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똑같은 논리'라는 얘기는 상당한 모욕인데요.

      '딴나라당과 알바, 친일'이야 근거를 얼마든지 댈 수 있겠습니다만, 공산당과 김정일알바들, 빨갱이와 '당신'과는 관련을 찾기가 어렵네요.

      말씀하신 의도를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존중은 상대성, 다양성을 기초로 해서 비롯된 것이지, 옳고 그름, 시비의 영역에 있어서 그름을 존중하라는 건 터무니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Favicon of http://ㅇㅇㅇ.ㅇㅇ BlogIcon 개한민국 2008.11.04 0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런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박정희 추종하지..

      그냥 패쓰

  4. Favicon of http://ㅇㅇㅇ.ㅇㅇ BlogIcon 하옹 2008.11.04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정한 기회주의자는 꺼삐단리 박정희 장군이지..

    공산주의자, 친미주의자, 친일파 안해 본게 없다

    명예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5. 역시 2008.11.04 0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라도가 최고죠^^

    우리 전라도의 아들 정동영님께서 대통령이 되셨어야

    우리 전라도가 사는데

    정말 이 울분은

    아무리 데모 나가도 풀리지가 않네여^^

    • 헉 무슨 정동영 2008.11.04 0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슨 정동영..미쳐..차리리 문국현이가 났고..권영길이가 났지..ㅎㅎ

    • 이거바라.. 지능형 안티네 2008.11.04 0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먼 정동영?

      먼 전라도?

      먼 데모?

      참.. 웃기시네. 지역감정 조장하지 마쇼 .

      딱보니 전라도인척 이상한말 하시는데 참나..

    • 가는구나 2008.11.04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타도어 하지마소. 전라도 인척하면서 은근히 지역감정조장하는 것은 정말 개념이 없이 하는 것이라요.

  6. 꺼삐딴 리 2008.11.04 0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는 우익도 없고 보수도 없어요..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해 뛰는 꺼삐딴 리만 있을 뿐...ㅎㅎ
    그리고 역대 최고의 꺼삐딴 리는 물론 박정희...

    그래서 박정희 잘 추종하잖아요..존경하는 대통령도 박정희..ㅎㅎ

    공부햇다는 대학생이나 농촌에서 농사 짓는 사람이나.
    산에서 삼캐는 사람이나, 사람 잡는 검사나..
    머리 속에 머가 있을 까 ??

    공부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머리 속에 생각하는 부분은 있을 까 ??

  7. 친일청산 2008.11.04 0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에는 대표적인 기회주의자가 있다.
    바로 친일파들이다.
    일제시대에 친일파들이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다시 득세했다.
    그들의 기득권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어 왔으며 사회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다.
    윗물이 이리 썩어 빠졌는데 무슨 ...... 쯔쯔
    할 말이 없다.

  8. 매국노청산안한게정말 2008.11.04 09: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들이 나라의 권세를 휘어잡고 좌지우지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거다 --

    과연 우리가 또 다른나라의 침략을 받는다면 목숨걸고 나라를 지킬 젊은이들이 나올수있을까?

    우리나라를위해 목숨바쳐 희생한분들은 3대가 가난하고 일본 뒤나 핥던 매국노들은 3대가 부자니 정말 분통터진다..

  9. 한국이.. 2008.11.04 0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대로된 선진국이 될려면 국민소득이 중요한게 아니라..
    국민의 마음가짐이 중요한데...한국은 아직은 한참 부족한듯...
    다음세대나 되야 길이보일까.,..

  10. 갱상 2008.11.04 1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가 남이가...

  11. 오호라 2008.11.04 1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는 모난 돌보다도 그 '정'을 없애버려야하지요...올바로 가려면.

  12. 장영철 2009.04.07 2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는만큼 보인다 했는데 국민이 무지하면 순전히 피해는 못가진자들에게 거의 돌아간다.특히 사회 시스템이 뿌리 내리지 못한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난데도 아직도 인물보단 혈연,지연,학연에 의해 지도자를 뽑고 있으니 불행의 씨앗은 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안타깝고,서글픈 현실..............

[발굴]청년방위대원도 6.25때 학살당했다

학살기록|2008. 7. 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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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국전쟁 때 노근리사건이나 보도연맹 사건과 같은 민간인학살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와 여러 사회단체의 노력으로 상당수 실체가 드러나 있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의 지도감독을 받았던 준군사조직이었던 청년방위대원들이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처형된 사례는 밝혀진 게 없었다. 어쩌면 학살의 가해자 쪽으로 분류될 수도 있었던 청년방위대원들이 피학살됐던 사연은 뭘까.

이 사례를 처음으로 발굴한 충북역사문화연대 김순애 교육부장의 취재기를 공개한다. 이 글을 계기로 기성언론들의 보충취재와 보도도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내가 녹음기와 캠코더를 들고 싸돌아다니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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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거의 매일 충북 영동에 간다. 이렇게 싸돌아다니는 게 나의 직업이다.

날이 더워져서 에어컨 안 나오는 마티즈 타고 고속도로를 탈 때면 조금 괴롭다. 그러나 영동만 들어서면, 울창한 산과 강과 바람 덕에 더위를 모른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놈이 촌스럽다며, 안 들겠다고 팽개쳐, 내 차지가 된 멜빵가방엔 디카와 녹음기, 수첩과 자료로 비좁다. 그리고 어깨엔 캠코더와 삼발이를 맨다.

왜 이렇게 준비물이 많냐구? 나의 출장은 옛이야기를 묻고 찍고 기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채록하는 이야기는 먼 일제 때부터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다.

마을에서 어르신을 만나면, 꾸뻑 인사한다. 그리고 “할아버지, 전쟁 때 여기에서 보도연맹원으로 죽은 사람이 있나요?”하면, “그건 왜 물어?”하고 의심스레 쳐다본다. “예,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분들 명예회복 시켜 드리려구요”하면, 그제서야 “그때 하도대리에서 많이 죽었지. 그 상황을 잘 알려면 남○○ 찾아가 봐”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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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똥을 맘껐 따먹게 해준 할머니(남우현의 처)

한 여름에도 물이 차갑다는 물한리계곡을 좌측으로 끼고 하도대리 본동 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에서 83년간을 살았다는 남우현 할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 찾아간 날은 할아버지가 들에 나가셨다. 이틀 후 다시 찾아가니, 이번엔 황간향교에 가셨단다.

“아이구 뵙기 힘드네요”하니, 할머니가 “보리똥하고 앵두 좀 따먹고 가”하신다. ‘에이 보리똥으로 배나 채우자’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많이’ 따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오셨다.

최초발굴 : 영동군 청년방위대원이 집단 처형된 사연

“어쩐 일이래요?”, “예. 6.25때 마을역사를 알려구요”하니, 전쟁 나기 전 '청년방위대'에 근무했던 일부터 입이 열렸다. “상촌국민학교에서 약 40~50명이 한 달간 훈련을 받았는데, 하루는 영동읍에 신무기교육을 받으러 간다구 20명을 차출하더라구.”

그런데 놀라운 이야기가 나왔다. 경산으로 간 20명 청년방위대원 중 10여명 국민보도연맹원이 경산코발트광산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 9명이 하도대리 청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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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상촌면 청년방위대 사무실 터에서(증언자 남우현과 충북역사문화연대 운영위원장 박만순)

이제까지 영동지역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20일 영동읍 어서실, 석쟁이재와 상촌면 상도대리와 고자리에서 300명 가량이 처형되었다고 알려져 왔었다. 그런데 어떻게 상촌면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산코발트 광산에까지 끌려가서 집단처형 되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청년방위대는 대한청년단이라는 단체에서 시작됐지만, 전쟁 때는 국방부의 지도감독을 받는 준군사조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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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증언하는 남우현 할아버지.

이 궁금증은 남우현 할아버지의 3시간에 걸친 증언과 관련 비문에 대한 현장 안내를 통해 해소될 수 있었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이 함락되고, 영동에는 다음날인 7월 21일 소개령이 내려졌어. 아내와 노부모를 남겨 논 채 마을 청년 11명이 피난증을 가지고 피난을 갔어. (영동군)매곡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에는 경북 김천가서 잤지.

그러다가 경북 경산을 가게 됐는데 아는 사람의 연고로, 코발트광산의 여관에 묵게 됐어. 하루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지에무씨(GMC)에 사람을 가득 싣고, 어디론가 달려. 트럭 네 귀퉁이에는 한사람씩 앉아있고 말여. 한시간을 앉아 있는 동안 40대가 지나가. 그런데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그러는 겨. 나중에는 노인도 실려 있더라고. 근데 그때는 트럭에 실린 사람이 누구고 어디로 가는 지 몰랐지.”

이들이 보도연맹원들이고, 영동군 청년방위대원 중 보도연맹원들이 끼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경산국민학교에 영동군 청년방위대원들이 있다는 겨. 그래서 마을 친구들도 볼 겸 갔지. 마침 정문초소에 친구가 있더라고. 그런데 경산국민학교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어.”

그러다 남우현씨는 방위군 장교 박홍기를 만났다. 박홍기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경산초등학교 운동장에 청년방위대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장부책을 놓고 하는 말이 ‘보도도연맹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눈감고 손들어’하데.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서 나가니까 교실로 데리고 갔어. 이들을 코발트광산으로 끌고 가 전부 처형했지. 내가 미리 내막을 알았더라면 동네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해서 상촌면 하도대리에서만 9명의 꽃다운 청년들이 코발트광산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학살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남승길(본동), 남칠현(본동), 남호현(본동), 이병덕(본동), 남응현(본동), 송정호(신기), 남승만(신기), 김창은(신기), 남종(소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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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랑비 측면의 국가유공자 명단.

그런데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 하도대리 마을자랑비에 국가유공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마을의 유래와 열녀를 소개한 마을자랑비 옆면에는 한국전쟁기 국가유공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비석에 9명의 코발트광산 희생자 명단이 섞여서 실려 있는 것이다.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순애(충북역사문화연대 교육부장)

용화면 청년방위대 인솔자 강태석 소대장의 고백(녹취록 요약)

증언일시 : 2008년 2월 13일
출생년도 : 1929년.
출 생 지 :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 내룡.

1943년 용화공립심상소학교 졸업했다. 17살 때 해방이 되었다. 용화광산에 있던 라디오를 듣고 해방을 알았다. 해방 후 용화에는 대동청년단이 있었다. 나도 대동청년단에 들었다. 단장이름이 정용석이던가 그렇다. 그분은 6.25때 장교로 전사했다. 용화국민학교에 모여서 연설을 들었다. 그때 부락에서 야경을 하고 초소막을 지어 놓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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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석 당시 청년방위대 용화면 소대장.

영동면화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대한청년단 훈련을 받았다. 100명이 넘었다. 면에서 좀 똑똑한 사람을 불러서 훈련을 했다. 그때 김영철이 교관이었다.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중대장은 이경승이었다. 소대장은 김긍식(어디사람인지 모름), 흘계사람 최양열, 월전리의 이조승, 용화리의 강태석이었다. 소대장이 리별로 다 있어야 하는데, 여건상 자계리와 용강은 정식임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소대장을 했다.

나는 수원 방위사관학교 5기생이다. 그때 동기생은 약 200명 쯤 된다. 양강면의 장시문 장구섭이 동기생이다.

권준대령이 지은 작전요무령을 배우고, 여순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장교들만 보았다. 그 영화는 사병들은 못 보았다. 1달 훈련을 받고, 50.5.31 임관했다. 임관 후 조동소대로 배치되었다. 대원이 조동과 안정리를 합쳐서 50~60명, 자계리 구백이 횡지 여의리 합쳐서 100여명, 용강리가 30명, 월전 흘계리가 50명, 용화 내룡 창골 합쳐서 50명 정도였다. 용화면 전체 청년방위대 대원이 대략 300여명이다.

6.25가 나자 전(全)대원을 용화국민학교에 집합을 시켜서, 이경승 중대장이 65명 지원을 받았다. 영동가서 1주 훈련하고, 완전무장하고, 고향으로 돌아 와 공비토벌하라고 했다. “강소위는 미혼이고, 혼자니까 거리낌이 없다. 적임자다. 훈련받고 이런 일을 하라”고 했다. 22살 때인데 무서운 줄을 모르고 하겠다고 했다.

7월 15일쯤에 영동에 나왔다. 도보로 영동에 나와 보니까 현역연대였다. 영동에서 1주일 정도 있었다. 5신병교육대 몇 중대에 편성이 되었다. 대장이 이대영 중령이었다. 무주사람과 영동사람 혼성팀이었다. 2-3일 수류탄 투척 각계전투 훈련을 하다보니까, 심천방향에서 불이 환하게 올라갔다.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대포가 올라가는 거라고 했다.

5~6살 더 먹은 선배들이 저녁마다 어디 갔다 오더니 추레했다. 고문을 받았는데, 보련(국민보도연맹)에 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잡아다가 캐묻는다고 했다. 보도연맹에 들은 사람들 나오라고 할 때, 벌써 신병교육연대에서는 벌써 그 명단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신원조회 해가지고 고향으로 쫓아 버릴 려나 보다’하고 그 사람들이 그때 이름 써서 냈다. 집으로 보낼 줄 알고 “같이 가자, 가자”하며 들었다. 그 사람들이 5신병교육대 연대본부에 가서 고문을 받았다. 5신병교육대 연대본부는 영동농협 맞은편에  일본사람이 살던 2층 목조집이었다.

숙소는 중국사람 천성태씨 집이었다. 거기 비어 있는 집에 가서 숙식을 했다. 방이 교실만큼 컸다.
 며칠 후 밤에 10시 넘어서 정거장으로 인솔하라고 했다. 인솔 중에 오포대 넘어 영미사진관이라고 있었다. 거기에 미군들이 와 있었다. 미군인데 흑인이 한국말을 했다. 어머니가 한국사람이라고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산코발트 광산 유해발굴 장면.(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짐싣는 차를 타고 2~3시간을 지나 한 12시가 넘어서 기차가 떠났다.  심천에서 대포가 올라가는 걸 보고 2-3일 쯤 후에 기차를 탔는데, 7월 20일쯤일 것 같다.  영동역에서 기차에 탄 사람들은 용화면사람 65명과 무주사람이었다. 용화・무주 중대장은 진경준 중대장이었다. 그리고 영동군내 다른 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용화면 사람만 기억하지 다른 면 사람들은 모른다. 날이 샐 때 쯤 보니까 대구 시내를 지나는 중이었다.

한참 있다가 경산에서 내렸다. 경산중앙국민학교로 데리고 갔다. 낮에는 교육 훈련을 했다. 그러다 2~3일 후에 보련에 가입한 사람들을 전부 빼내서, 6중대라고 새로 중대를 편성을 해서 강당에 집어넣었다. 머리를 빡빡 깎아서 집어넣었다. 강당에 넣은 지 5~6일, 근 일주일 있었다. 강당에는 한 100여명이 있었다. 용화면 사람은 22명이고 더 있을 수도 있다. 설천면 사람도 두 명이 아는 사람이 있었다.


영동에 있을 때 밤에 고문당하고 추레하게 있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보도연맹으로 불려간 용화면 사람들 22명 이름을 손으로 꼽는다.

안정리 이갑문, 조동리 박태하・정규태・박규성・이남희(이명 이재춘)・양상수・이종관(동창)・강원형(동창)・김삼조(나이 많다), 창골의 장재호(선배)・강영희・이갑봉, 용화의 양도영(동창)・최창덕, 하용강의 김용한, 구백이의 김해봉, 횡지의 김종진, 여의리의 이시영, 흘계의 강낙희, 월전의 임원승・김삼봉・박달준씨 동생.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발굴된 유해.


그리고 무주군 설천면 사람도 있었다. 기곡리의 퇴일동네에 살던 동창생 박래한과 김옥래가 확실히 6중대에 들어갔다. 양강사람 장시문이 예비군 중대장을 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집에서 죽었다.

경산국민학교에서 6중대를 따로 분류할 때 불길한 마음이 들어, 청방교육대 정보과로 가서 “왜 따로 놓느냐”고 물으니까 육군중령이 “걱정말라”고 했다. 근데 그날로 다 데리고 갔다. 방위장교한테 물으니 “헌병들이 와서, 엮어서, 싣고 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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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_top_blogtop=go2myblog BlogIcon 실비단안개 2008.07.08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중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2. 육방(육개월 방위) 2008.07.08 2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배님들이 저런 고초를 겪었다니 가슴이 아프네요.
    그런데 왜 현역에 입대하기 위한 방위대원들이 광산에서 죽었나요?
    방위는 사람이 아닌가요?

  3. 진지 2008.07.09 0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촌면이 우리 고향인데~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전쟁이 나서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입대 했는데,
    그중에 보도연맹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니. 이해가 안 간다.
    글을 읽어 보니 하도대리 사람 9명이 죽었다는데, 정말 사실인가?
    믿을 수가 없다.
    누군가 답좀 해봐요~

  4. 짱돌 2008.07.09 0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첨에 사진이 이상해서 여기 글을 읽었다.
    근데 이게 모냐?
    강가에 뒹구는 자갈도 아니고 다 사람들 뼈라고..
    참 ..심하다!!

  5. Favicon of https://armishel.tistory.com BlogIcon 아르미셸 2008.07.09 05: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말을 이해하려면 보도연맹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해방이 될 당시 남한에는 공산주의에 접했었거나 그와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는 이들이 있었고 사상관련 문제로 체포된 이들에게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준다는 의도로 보도연맹이라는 것이 조직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잘 설명해줄 분들이 많을테니 약간 더 검색해보시고요,

    사실, 이 보도 연맹원 중에는 공산주의자였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냥 동네별로 할당되었다던지 하는 이유로 별 상관없는 이들까지 관련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에 대한 시선은 급냉각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북한과 싸우는 상황에서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의혹의 화살이 이들에게 돌려진 것이죠. 또, 보도연맹원의 일부가 남침해온 북한군의 편을 들어서 그 동안 입었던 불이익을 보복했다는 소문들이 퍼지자 이들에 대한 학살이 전국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부족해서 추측등에 의존하는 바가 많고 어느 정도 윗선까지 보도연맹 학살에 연관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상당히 고위층까지 연관되어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한 것이고요, 문제는 앞에도 설명했듯이 보도연맹원 중에는 실제로는 공산주의랑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까지 있었지만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국군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점점 학살은 무분별하게 확대되었습니다. 그러한 학살과정의 일부에 해당되는 사건이라고 보이네요.

    저도 전공이 아니라서 많이 아는 것은 없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숨겨진 과거들이 뜻있는 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데 일이 잘 되어서 다시는 이렇게 불행한 과거가 재현되지 않도록 했으면 합니다.

  6. 흑비 2008.10.10 1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전쟁은 북한에게만 책임이 잇는것이 아니다 남한의 무책임한학살을 방치하고 실행한 정부와 국군의행동이 역겹다 희생자의 가족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제라도 이루어져야한다 자기들 가족아라고 하면 그럴수 잇겟나 살인마들아....

  7. 장영철 2009.04.07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억울하게 죽어간 순박한 우리의 조상들.힘을 길러야 함부로 못할겁니다.

한국에서 하나뿐인 경찰관 공덕비

학살기록|2008. 6. 2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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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1950년대 용화리 전경.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에는 아주 특이한 비석이 있습니다.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입니다.

이 경찰관은 상부의 지시를 거역하여 민간인 집단학살을 막은 분입니다. 경찰관에 대한 이런 종류의 비석은 아직까지 전국에 유일합니다. 또한 이 공덕비의 존재가 매체를 통해 알려지는 것도 이 포스트가 처음입니다.

민주지산 아래의 특이한 비석

이 비석은 죽음의 구렁텅이에 내몰린 지역 주민들을 자기 목숨을 걸고 살려 준 이섭진 지서장의 아름다운 인간애를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용화리 주민들이 십시일반 마음과 돈을 모아 세운 비석입니다. 살아난 사람들은 국민보도연맹원입니다. 그는 한국판 쉰들러였던 셈입니다.

56년간 비바람을 맞아, 글씨가 흐리지만 알아 볼 수는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支暑主任 李燮晉 永世不忘碑

剛明莅事 濟之慈仁 (강명이사 제지자인)
鎭玆一區 傍及外鄰 (진자일구 방급외린)
家家懷德 人人迎春 (가가회덕 인인영춘)
路上片石 永年不泯 (노상편석 영년불민)

-檀紀 四二八五年 十一月 十一日 住民一同-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

강직하고 현명하게 일에 임하여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사람을 구했네
한 고을을 잘 다스리니 그 덕이 이웃에까지 미쳤도다.
모든 사람들이 봄을 맞이하듯 집집마다 그의 덕을 기억하여
비록 길가에 세운 조각돌일지라도 영원히 잊지 말자.

-1952년 11월 11일 주민일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섭진 지서장 영세불망비.


전국에는 한국전쟁기에 보도연맹원을 포함해 민간인학살 과정에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지역유지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세워진 비석이 몇 개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제주도 대정읍 하모리 진개동산에 마을 주민들을 살리는 데 공이 많은 김남원 면장과 조남수 목사의 공덕비입니다.

하지만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에 대한 공덕비는 이곳에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예비검속 된 수 백 명의 지역민들을 살리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문서장의 공덕비를 함께 세우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희생자 위령비가 없는 상태에서 경찰출신의 공덕비를 먼저 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세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 등을 살려주어, 마을 주민과 유족들이 세운 경찰공덕비로는 '이섭진 영세불망비'가 전국에서 유일한 것입니다.

용화면 보도연맹원 30여명이 살아난 이유

전쟁이 발발하고, 대전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1950년 7월 19일 용화면 보도연맹원들이 모였습니다. 아침 일찍 순경이 마을에 와서 “보도연맹원 소집교육이 있으니 반드시 참석하라”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인 3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은 낮에는 돌로 지서울타리를 쌓는 작업을 하고, 밤에는 용화초등학교 뒤 창고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바쁜 농사철에 1박 2일의 소집교육이 무척 불만이었지만, 내일이면 집에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잠을 청했습니다. 내일이면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린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사용자 삽입 이미지상촌면 상도대리 숯가마.사용자 삽입 이미지영동대 부근 석쟁이재.사용자 삽입 이미지영동읍 부용리 어서실.

용화면처럼 영동군 내 모든 읍면 보도연맹원들은 영동경찰서나 지서에 소집되어 하룻밤을 잔 후, 그들이 상상도 못한 일을 당합니다. 군인들의 총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영동군 내 30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은 7월 20일 영동읍내 어서실과 석쟁이재, 상촌면 고자리에서 집단학살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영동군에서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용화면 보도연맹원들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순전히 의로운 경찰 이섭진 지서장의 용기 있는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섭진 지서장(사진 우측).


전쟁 당시 용화지서장을 맡고 있던 이섭진은 1950년 7월 18일 오후에 영동경찰서장의 긴급호출을 받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해 보니 모든 지서장들이 참석해 있었습니다.

김경술 서장은 참석한 지서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오전에 (이시환)도경국장과 특무대(CIC) 파견대장으로부터 지시받은 사항입니다. 내일 중으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모두 격리하라는 지시입니다. 오늘부터 유치장도 특무대가 관리한답니다. 전시 비상계엄 하에서 어쩌겠소. 군에서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남부 네 개 면은 황간지서로, 용화면은 용화지서로, 영동읍을 비롯한 나머지 여섯 개 읍면은 경찰서 수사계로 인계하되 황간지서장과 용화지서장은 지서나 창고에 이들을 집결시켰다가 특무대에 인계하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교육소집이니 한사람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바로 실행하십시오.”

지시사항을 들은 이섭진 지서장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처형하겠다는 뜻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6개월 전에 정부에서는 과거 좌익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북한과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하겠다’라는 취지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든 것이 아닌가? 또한 보도연맹원 대다수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자무식의 농사꾼들이지 않은가? 해방 후 격동기에 “농토를 나눠 준다”, “비료 배급해 준다”라는 이야기에 도장을 찍은 것이 남로당원 가입서이고, 농민회 가입서 였고, 이것이 자동으로 보도연맹 가입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전향을 시켜 보호하겠다’라는 취지는 어디 가고, 모두 죽이겠다라는 것인지.....

이섭진 지서장은 부인 박청자와 상의 후에 자기 목숨을 걸고 서라도 보도연맹원을 살려 주어야 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7월 19일 오후, 보도연맹원 한 사람을 데리고 창고로 갔습니다. 창고는 일제 때 지은 것으로 나무 판자를 엮어 흙을 바른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낡고 허름했지만 30여 명은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섭진은 널빤지를 구해다 허술하게 봉창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철사나 끈을 자를 수 있는 칼과 가위를 하나씩 창고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지서로 돌아오는 길에 이섭진은 동행한 보도연맹원에게 은밀히 당부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상촌면 고자리 현장과 유족들.


“무슨 일이 생기면 아까 막아둔 봉창으로 빠져 나와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게. 이유는 묻지 말고. 그리고 지금 내가 한 말을 절대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안 되네.”

이 이야기에 눈치를 차린 보도연맹원들은 그날 밤 모두 탈출을 했습니다.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었습니다.

용화면 보도연맹원 중에 죽은 사람들은 청년방위대원으로 전쟁 직후에 자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수복 후, 이섭진 지서장의 아름다운 행동은 순식간에 용화면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집니다. 1951년 말 이섭진은 매곡지서장으로 발령을 받는데, 이를 아쉬워하는 용화주민들은 지서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해 11월 11일 주민들은 이섭진 지서장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는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를 세웠습니다.

/박만순(충북역사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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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헤메는 발길 2008.06.21 11: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지서장님은 참 훌륭하시고 세세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공직자가 자기의 임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하기 보다 인간에 대한 존엄을 우선시 하는 행동은 오늘날의 검경찰도 꼭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3. 개구쟁이 2008.06.21 1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분을 경찰청장으로 만들어야하는데..어쩌고,,
    장하시네요
    존경스럽네요.
    우리민족의 우상이 되길..아니 경찰의 우상이길...

  4. 팔도사나이 2008.06.21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고향이 영동이고 친구집이 용화면인데..
    함 찾아가야 겠습니다..
    존경합니다~~

  5. 우리집강쥐바기 2008.06.21 1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정한 경찰이고 진정한 공무원이네요.

    지금도 묵묵히 국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있는 현실을 보면 또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네요.
    저런 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존경합니다.

  6. 이회창애비 2008.06.21 12: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회창애비 비석있냐? 이놈들아?

  7. 살고싶은 한국인 2008.06.21 1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사람이 지금도 대한민국에 있어야 하는대 지금 있을까 없을까 내가 한번해보면은 좋을것같은대 정말로 그런 경찰이 단한명이라도 존재할까 정말로 궁금하내 내 생각은 없다로 결론을 짖어본다 있으면은 이리될까

    • 정일사랑 2008.08.26 0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찰관이 아니시더라도 많으시죠.

      요사이 소방 공무원님들 자신의 일에 충실히 하시다가

      순직하시는분 이섭진지서장님 못지않게

      우리가 고마워하고 감사해야분들이네요.

      그 당시일들을 생각하니 맘이 넘아프네요. 일반 민간이이 아무것도 모르고 많이 죽었다는것이 맘아픔니다. 그와중에서 칭송할만한 경찰관님이 계셨다는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고 눈물이 납니다.

  8. 객인 2008.06.21 1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덕비 : 선정(善政)을 베푼 감사(監司)나 수령(守令) 등이 갈린 뒤에 그들의 공덕을 기리어 그 고을 주민들이 세운 비석(碑石).

    절이나 기관에서 세워주는것은 이름만 공덕비이지 실제 뜻과는 괴리가 있습니다.
    지금 이 글쓰신분이 말씀하시는게 맞습니다. 이게 처음이 맞고 한개가 맞습니다.
    다른것들은 단체나 기관에서 감사의 뜻으로 세운것이고, 공덕비의 본래의 뜻을 가진것은
    저것밖에 없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9. 네이티 2008.06.21 1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은, 사람다워야 사람입니다. 요새는 사람다운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죠?

  10. 용궁물랫 2008.06.21 1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용인서장 공덕비도 있는데요 인터넷검색 곡성서장

    • 정일사랑 2008.08.26 0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이버 야휴에 발견 안되네요.자세히 주소를 써주시면 좋것네요
      그러구,공덕비가 하나건 두개건 열개먼 더 좋겠지만, 여기서 댓글로서는 의미는 별루네요

  11. 여인천하 2008.06.21 1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훌륭하신분입니다. 아마 격동기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렇게 노력하신분들이 많을겁니다.

  12. 광장 2008.06.21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글을 읽으며 좌우가 싫어진다.

    이분은 쉰들러 좌파의 귀감이며

    이분은 친일파 우파의 표상이다.

    필요하면 친일파요,필요하면 빨갱이니

    도대체 이사람의 근본은 무엇인가?

    살려고 하는짓에 그무슨 의미부여

    그것을 선현들은 곡학아세 표현하네

    독도수비 당연히 먹고살려 한일인데

    어느신문 독도수비 미역채취 운운하네

    먹고살려 땅지키지 명예타려 땅지키냐?

    지금은 그기사 찾을수도 없다네

    기사발굴 좋다지만 보도연맹 빼버리면

    이분은 영락없이 친일의 앞잡이네

    • 태린맘 2008.06.26 1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희 할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잘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신지..친일 앞잡이라고 하셨나요? 당시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표현하시는게 지나치시네요..
      안타깝습니다..

  13. 은하수 2008.06.21 15: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몰랐던 것을 알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제 고향 근처인데도 아직껏 그러한 사실이 있는지도 모른채 살아왔습니다... 고향가는 길에 한번 들러 그분의 덕에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것 같아서...그리고 위 글을 빌려갑니다...

  14. 부사리 2008.06.21 1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에서 하나뿐이라는것은 님께서 모르시고 쓰신 글인것 같습니다.
    6.25사변때 지리산 일대에 빨치산이 활동 거점으로 삼아 맹위를 떨치고있을때
    지리산 화엄사를 중심으로 빨치산이 활동을 한다고 경찰 수뇌부에서
    화엄사를 불태우기로 결정을 하고
    소각명령을 내렸읍니다.
    그러나 당시 토벌대장이었던 차일혁총경은
    문화재를 소각하는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일이라고 하면서
    상부의 명령을 듣지않고 화엄사를 지켜냄으로써
    화엄사를 지킬수 있었기에 이에 고마움을 표하기위해
    화엄사 경내에 구례군민과 화엄사가 공동으로 공덕비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15. 또롱 2008.06.21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려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16. 태린맘 2008.06.24 14: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모가 daum블로그에서 할아버지 존함을 쳐보라고 하셔서 이 글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 내용이 책으로 나오기전에도 엄마한테 외할아버지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어요..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땐 그저 엄마의 아버지이고 나의 외할아버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훌륭하신 분인지 나중에야 알았어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엄마가 할아버지를 그리워하시면서, 역사에 남을 훌륭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내용 외에도 할아버지가 크리스찬으로서 얼마나 믿음이 강한 분이셨는지,
    항상 약자의 편에서 방패가 되셨다는 말씀도 들었어요..
    그 뒤엔 늘 할머니의 기도가 있었다는 것도..

    책이 나왔을 때, 할아버지 일대기가 책으로 나왔으면 하셨던 엄마의 바램이 부분이나마 이루어진거 같아서 감사했는데, 블로그에도 기사화되어 더 감사한 마음이에요..
    할아버지의 공을 알려야 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처럼 적막한 세상에서 한 줄기 희망이 되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그게 할아버지가 실천한 사랑이니까요..

    엄마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워 하셨던 할아버지..저도 정말 자랑스러워요..
    천국에서 지켜보고 계실 엄마와 할아버지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글 감사합니다..

    • 선산을 지키는 나무 2008.06.25 0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엄마가 돌아가셨군요. 가족은 너무 가까워서 늘 모르고 지나는 것이 있기도 하지요. 할아버지랑 엄마가 다른 영역에서 미소 띄우고 있을 것 같아요. 살아있건 그렇지 않건 다정한 가정이시군요...따뜻해서 참 좋아요..내내 행복하세요. 글고 좋은 가정 이루실 것 같아요^^

    • 정일사랑 2008.08.26 0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라서 눈물이 납니다.

  17. 코알라 2008.06.24 1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린맘 누구인가?
    글로봐서는 내조카님인데.....
    오늘도 너희엄마 예기를 많이했고 안타까왔다.. 그리고 보고싶고.....
    누구보다도 좋아하고 기뻐했을것을 ...

  18. 영민 2008.06.26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아버님의 이야기을 읽어주시고 뎃글을 달아주시고 관심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부모님께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셨읍니다 두분께서는 밤세워 눈물로 기도하시고 그일을 하셨읍니다 부모님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하지아니하시고 그분들을 위하여 밤새워기도하셨읍니다 무척 두려웠다고 하셨읍니다 종교적인 차이점은 있겠지만 그순간 그런 결정을 하신것은 그분들의 하니님에 대한 믿음으로 선택하신일입니다 오해없으시기바랍니다 또 52년 매곡에서 또한번 기도하시며 실행하신일이있읍니다 책에는 나와있읍니다 그때도 목슴을 걸고 하셨읍니다 그리고 저희 부모님은 30세에 그일을 하셨읍니다 어머니는 만삭이셨구요 어머님은 금식하며 기도하셨읍니다 저희아버님은 절대로 친일파도 일본군앞잡이도 아니싶니다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관십 보여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정일사랑 2008.08.26 0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에서 최고로멋진 경찰관 아버지 어머님를 두셧네요.

      저두 멋진 이섭진 경찰관님이 계셨다는것이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합니다.

  19. 원형 2008.08.26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때나 지금이나 이념이 뭔지..
    참 ...눈물이 나네요...

  20. Favicon of http://교ㅛㅑㅐ BlogIcon 박진 2008.10.08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서장님의 그후 행적이 궁금 합니다

  21. 의산 2017.07.09 1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훌륭한 분.
    그런데 책 이름은 뭔가요?

눈길 끄는 지역신문의 촛불집회 특별판

역사기록|2008. 6. 20.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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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해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1980년 봄부터~87년 6.29선언까지 경남지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취재해 [경남도민일보] 지면에 연재했던 적이 있습니다.

 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

그 때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6월항쟁 당시 진주지역 시위를 담은 사진이 한 장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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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진주지역 대학생의 격한 시위는 서울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된 후 소강상태였던 항쟁에 다시 불을 질렀다는 평가를 받을만 했습니다. 6월 17일 경상대학생들이 경찰의 동료학생 연행에 항의하며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하고 LPG수송트럭 2대를 탈취해 경찰과 대치한 사건은 전국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다음날인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행사에 다시 많은 시민이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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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이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거였습니다. 당시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이 제공한 사진이 서울지역언론에 실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실은 신문이나 제공한 연합뉴스도 이 사진을 찾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당시 이를 취재해 보도했던 [경상대신문]도 사진을 보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학보사 기자를 했던 이를 어렵게 찾아 연락해봤지만, 그 역시 사진이 없다고 하더군요.

결국 남아있는 것은 당시 신문에 보도됐던 흐릿하고 빛바랜 사진을 스캔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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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란 이런 겁니다. 당대에는 널리고 널린 게 자료인 것 같지만, 불과 10년, 20년만 지나도 대부분 멸실되고 마는 게 현실입니다. 아마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촛불집회의 각종 유인물과 자료집, 사진들도 수십 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특히 서울의 경우엔 그나마 낫습니다. 하지만, 소규모 지역의 경우 연일 개최되고 있는 촛불집회를 제대로 기록하는 블로거도 없고, 지역신문도 제대로 취재해 보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산된 기록물이 없으니, 보존할 기록물도 없는 셈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엊그제 집으로 배달돼온 주간 [진주신문]을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신문을 펼치자 타블로이드 8면 판형의 촛불집회 특별판이 끼여 있었던 겁니다.

지난 10일 열렸던 진주의 촛불집회 상황과 함께 촛불이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대통령과 정부가 뭘 잘못했는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또 10일자 일간신문의 주요 만평을 실었고, 관련 칼럼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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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것은 6월 10일 이전에도 진주지역에서 여러 번 촛불집회가 열렸는데, 그걸 역사기록 차원에서 전체를 정리한 기사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나마 특별판까지 만들어 보도한 신문은 경남지역에서 아마도 [진주신문]이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진주신문], 고맙습니다.

이왕이면 아래 자료실에도 사진과 기사 좀 올려주세요.
http://cafe.daum.net/chotbul (08년 촛불항쟁 역사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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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렇군요 2008.11.04 1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정말 개념있는 훌륭한 신문이네요.

지역언론이여, 역사기록이라도 충실하자

역사기록|2008. 6. 2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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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일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회(위원장 정태진·교사)가 보다 못해 한 마디 했다. 명색이 경남지역 종합일간지라면서, 도내 10여곳에서 열리고 있는 촛불집회를 마산·창원 위주로만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일례로 밀양에선 그동안 10차례에 걸쳐 촛불집회가 열렸지만, 단 한 번도 지면에 보도되지 않았다고 질타했다.

사실 그랬다. 마산·창원 외에도 진주·김해·거제·통영·밀양·의령·함안·창녕·고성·남해·하동·거창 등 대부분의 시·군에서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지만, 신문에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심지어 군사도시라는 특성으로 사회운동의 불모지라 부르는 진해에서도 지난 7일 '무려' 250여 명이 모인 촛불집회가 열렸다. 명색이 기자라는 나도 경남도민일보 지면이 아닌, '실비단안개'님의 블로그를 통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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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에도 실리지 않은 진해의 7일 촛불집회를 전한 '실비단안개'님의 블로그 사진.


진해 같은 도시에서 250명의 시민이 모여 정권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면 가히 '역사적인 사건'이다. 87년 6월항쟁 때도 진해에서 시위가 있었지만 참여한 인원은 50여 명에 불과했었다.

경남도민일보뿐 아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더니 다른 지역신문들도 대동소이했다. 물론 신문이 기록하지 않아도 블로거들이 자발적으로 사진과 기사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서울과 대도시에 집중돼 있다. 농촌지역의 소규모 촛불시위는 블로그에도 오르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나는 지난해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80년대 경남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26회에 걸쳐 연재한 바 있다. 당시 취재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기록의 부재였다.

그럼에도 가장 큰 도움을 얻었던 것은 당시의 지역신문과 대학의 학보·교지 등에 실린 기사였다.

당시 지역신문이 비록 논조는 시위대에 적대적이었지만, 각 시·군에서 있었던 시위자체를 누락시키지는 않았던 점은 놀라웠다. 최소한 사회면 귀퉁이에 1단으로라도 보도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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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당시 마산의 6.10대회를 전하고 있는 경남신문 1987년 6월 11일자 사회면 기사.


그러나 지금 많은 지역신문들은 팩트 자체를 누락시키고 있다. 이건 지역신문으로서 엄연한 직무유기다. 특히 집회나 시위에 대한 보도는 언론으로서 기본이다. 집회 참석자들은 다음날 신문에서 자신이 참석했던 그 집회가 지면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본능적으로 확인하려 한다. 독자에 대한 기본적인 서비스다.

지역신문들은 늘상 정치·경제·문화의 서울집중현상을 성토한다. 또한 서울지(소위 '중앙지')의 지역신문시장 잠식에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면서 자기들도 본사가 소재해 있는 대도시 위주의 보도관행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지역 안에서도 작은 시·군은 이중으로 소외되고 있다.

오늘이 6월 9일이다. 촛불정국의 분수령이 될 6·10대회를 하루 앞둔 날이다. 지역에서도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한 달쯤 된 날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각자 자기지역 촛불집회 중간결산을 특집으로 꾸며보자. 이 특집에서 그동안 누락됐던 시·군의 작은 집회까지 모두 기록하자.

지역신문이 뭔가. 자기지역의 역사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게 신문이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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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항쟁'의 기록물을 남겨 주십시오

역사기록|2008. 6. 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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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년 전국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촛불집회는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후퇴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87년 6월항쟁에 버금가는 촛불항쟁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항쟁에 참여한 여러분이 곧 역사이며, 여러분이 외치는 구호와 손팻말, 펼침막 등 각종 시위용품이 곧 역사의 기록물입니다. 이 기록물을 여러분이 직접 남겨주십시오. 이 자료는 모두에게 공유될 것이며, 이후 설립될 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달할 것입니다.

○ 자료 올리기 : '08년 촛불항쟁 역사자료실'(http://cafe.daum.net/chot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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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직접 제작했다는 유인물도 생생한 역사기록물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대운하와 공공부문 사영화 등 이명박 정부의 총제적인 정책에 대한 항쟁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민들은 경찰의 폭력진압과 언론장악 시도에서 드러난 '민주주의의 후퇴'에 분노하는 국민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20여 년 전의 '87년 6월항쟁'에 버금가는 '08년 촛불항쟁'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항쟁에 참여하고 계시는 여러분이 곧 역사이며, 여러분이 외치는 구호와 손팻말, 펼침막 등 각종 시위용품이 곧 역사의 기록물입니다.

저는 미력하나마 한반도의 남단 경남 마산의 현대사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1945년 해방에서부터 1979년 부마민주항쟁까지의 지역사를 묶어 <토호세력의 뿌리>(2004, 도서출판 불휘)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또한 2007년에는 6월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80년부터 87년 6·29항복선언에 이르기까지의 경남역사를 모아 <80년대 경남의 민주화운동>을 26회에 걸쳐 연재한 바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안타깝고도 힘들었던 게 '기록과 자료의 부재'였습니다. 특히 서울이 아닌 지역의 자료 부재는 심각할 정도입니다. 6월항쟁 당시 진주지역 시위의 경우, 제가 어렵사리 찾아낸 단 2장의 사진 외에는 LPG 가스차량 탈취시위와 고속도로 및 철도 점거투쟁에 대한 사진들이 한 장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을 정도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세계적으로도 찬란한 기록유산을 남긴 우리의 선조들에 비해, 해방 후 이 땅의 위정자들은 기록물을 보존하기 보다 '파기'하는 데 오히려 골몰해 왔습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독재정권은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를 자신의 범죄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생각한 탓인지 철저히 증거인멸 정책을 썼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나라에는 도서관(Library)과 박물관(Museum)의 수만큼이나 많은 역사기록관(Archive)이 우리나라는 전국을 통털어 한두 개밖에 없는 이상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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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이 갖고 있는 손팻말도 역사기록물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독재에 저항해온 수많은 민주단체 역시 기록물에 관한 인식은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엄혹한 독재시절 유인물 한 장 때문에 감옥에 가야할 일이 비일비재했던 상황에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게 조직보위의 한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몇 십 년 되지 않은 민주화운동의 기록조차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민주항쟁의 기록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지금 우리가 만들어나가고 있는 역사만큼은 풍부한 기록물로 남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인터넷이 있어 수많은 사진과 자료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이란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분류하며 보존해두지 않는 이상 의미를 갖기 어려울 뿐더러 언제 멸실될지 모르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급한대로 다음에 '08년 촛불항쟁 역사자료실'(
http://cafe.daum.net/chotbul)이라는 카페를 열었습니다.

각종 기록사진과 손팻말, 펼침막, 유인물 등 기록물을 여러분이 직접 남겨주십시오. 유인물이나 손팻말은 스캔을 하셔도 좋고 사진으로 찍어올리셔도 좋습니다. 사진 용량은 다음카페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크게 올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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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들도 지하철 입구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있다.

특히 서울지역보다 그 외 지역의 자료들이 더 소중합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보다 소규모 지역의 작은 투쟁이 더 소중할 수도 있지만, 그런 곳일수록 자료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료는 누군가 독점할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모두에게 공개하는 것으로 설정해두었습니다. 다만 자료를 올리실 땐 카페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회원가입을 하신 분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자료는 모두에게 공유될 것이며, 가능하다면 이후 설립될 민주화운동기록관에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혹 웹상의 기록물 관리에 대한 더 좋은 의견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 자료 올리기 : '08년 촛불항쟁 역사자료실'(http://cafe.daum.net/chot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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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oulream BlogIcon 어울림 2008.06.05 2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야지요. 이 항쟁이 실패하든 성공하든(실패한다 해도 다시 항쟁이 일어날테니.. 이 정부는 오래 못갑니다) 자료를 남겨야 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역사니까요.
    이 글, 아고라랑 안티MB로 퍼가거나 링크 형식으로 연결시켜드리겠습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oulream BlogIcon 어울림 2008.06.05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아예 카페를 만들어 놓으셨군요 ^^

  3. Favicon of https://geodaran.com BlogIcon 커서 2008.06.05 2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여학생 어제 서면에 있던 분 같은데요. 저도 측면에서 찍었습니다. 그리고 지공사님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있었습니다. ^^ 그래서 엇그제부터 보이는데로 모으고 있습니다.

  4. 웃기지도 않네 2008.06.05 2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치창조야 5년살다 왔다고? 내 친구 20년간 이민가서 살다가 잠시 귀국한 지난주에 만났다. 광우병 소라는 말 졸라 잘 알고 있고 버지니아 주에서 유사 광우병으로 사람 죽었다는 기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이야기 하더라.

    너야 말로 북에서 내려와 국민을 분열시키려는 빨갱이 아니냐?

    너부터 조사해 보자.

  5.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_top_blogtop=go2myblog BlogIcon 실비단안개 2008.06.05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 한페이지에 촛불문화제 언론 뉴스와 블로거 뉴스를 계속 올리고 있는 중이며, 대운하 반대 티스츠 구입, 오늘은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현수막을 구입하였습니다.
    역사의 현장에 함께인 우리 - 공유가 가능하다니 좋으네요.

    따로 카페방문을 하겠습니다.

  6. 권근택 2008.06.05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입니다. 기사로 소개하겠습니다.

  7. 네이버가 짜증나서 왔는데 2008.06.06 0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자극적인 기사들 이젠 진절머리 난다

    물론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수입 협상은 잘못이다

    하지만 재협상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가 FTA에서 자동차 분야에서 이득을 보았다고 한다. 미국이 다시 하자면 하겠는가??자신들이 손해라서 안되겠단다. 이게 말이 된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과연 미국은 어떻게 할까?? 순순히 재협상에 응해줄까??

    아님 우리 정부의 다급함을 이용해 차후에 더 큰것을 해줄 조건을 내걸까???

    걱정이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재협상 물론 할 수 있다면 하면 좋겠다... 하지만 협상이라는 것을 주워 담으려면 더 큰 것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광우병 걸려있을 수 있는 소를 수입하는 것은 나도 싫다... 하지만 과연 재협상으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될 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 교수님, 생고기 너무 잘먹었습니다

일상기록|2008. 5. 2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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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맛집 관련 포스팅을 자주 하니까 "저 놈은 돈 벌어서 다 먹어치우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좀 그렇습니다. 다 먹어치우진 않지만, 그래도 맛있는 거 사먹는 데는 크게 아끼지 않는 편입니다. 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적이지 않습니까? 이게 제 삶의 원칙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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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에는 제 돈을 들이지 않고 정말 맛있는
쇠고기를 먹었습니다.

지난 5월 17일
광주에서 '지공사(지역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첫 모임이 있었습니다. 모임을 마친 후 전남대 최정기 교수께서 맛있는 집을 안내하셨는데, 광주에서 쇠고기 구이와 생고기로 유명한 '유명회관'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약 5년 전
광주에서 소생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어느 식당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제가 사는 경상도에서 그런 식의 생고기를 해주는 식당을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얼린 쇠고기와 배를 채 썰듯 썰어서 참기름계란 노른자에 비벼주는 육회는 있어도 광주식 생고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광주에 가면 꼭 다시 생고기를 먹어보리라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년에도 광주에 갔지만 일행들과 함께 움직이는 바람에 그 기회를 놓쳤는데, 이번에 다시 먹게 된 것입니다.

모두 7명이었는데, 생고기 2인분과 안창살(
구이) 7인분을 시켰습니다. 이 집에서 1인분은 무조건 200g이라고 합니다.

생고기와 함께 각종 서비스 메뉴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횟간과 처녑(또는 천엽)이 먼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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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는 횟간이고, 아래는 처녑입니다. 육회도 나왔는데, 경상도와 많이 다릅니다. 이것 역시 광주식 육회가 더 고소하게 맛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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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은 다른 곳에 비해 그리 비싸지도, 싸지도 않습니다. 한우만 취급한다고 써놨습니다. 설마 생고기를 파는 집에서 수입산을 속여팔기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믿고 먹었습니다.

하지만 30개월령 이상되는 미국산 쇠고기가 본격 수입되기 시작하면 이 집도 적잖은 타격을 받겠죠. 워낙 못믿을 세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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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생고기입니다.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소 엉덩이살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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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가까이서 찍어본 생고기 모습입니다. 된장과 참기름, 마늘 으깬 것으로 만든 소스에 찍어먹거나 그냥 참기름 소금장에 찍어먹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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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국입니다. 선지와 무, 콩나물을 넣어 만든 국인데, 시원하고도 감칠맛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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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주인아저씨(요리사인가?)가 도마와 고기를 갖고 오시더니 고기를 썰기 시작합니다. 안창살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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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고기를 썰어줍니다. 신뢰를 위해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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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가 좋아보이시나요? 제 눈에는 아주 좋은 고기로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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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기 시작합니다. 이 고기는 너무 바싹 굽지 말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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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짝 익은 상태에서 먹어야 맛있답니다. 너무 익어버리면 고기가 딱딱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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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때쯤 새로운 메뉴가 나왔습니다. 대구에 사는 노용석 박사가 뭔가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짓습니다. 옆의 최정기 교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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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용석 박사가 놀란 건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구워 먹어야 되느냐"고 물으니, "이 집에서 상추 위에 얹혀 나오는 것은 모두 생으로 먹는다"더군요. 이건 차돌배기살입니다. 저도 이걸 생으로 먹는 건 처음 봤습니다. 너무 쫄깃하고 맛있더군요. 이 맛 역시 못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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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날 우리 일행들 모습입니다. 종업원께 부탁해서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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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돌배기 가까이서 다시 한번 찍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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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서비스인데요. 오징어입니다. 고기 다 먹은 후에 구워먹으라고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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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하젓과 열무김치입니다. 토하젓 맛도 일품이었습니다. 이거 하나만 갖고 밥 한그릇 비워도 좋을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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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하고도 시원한 된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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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룽지밥입니다. 된장과 궁합이 딱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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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반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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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날 모든 비용을 최정기 교수께서 부담했다는 겁니다. 다음 모임을 마산으로 잡아놓은 터여서 제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마산서 모일 땐 제가 모두 부담해야 하는데, 선례를 처음부터 바로 남기기 위해 각자 갹출합시다."

그랬더니 최 교수가 극구 자신이 부담하겠다네요. 참 큰 일입니다. 어쨌든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가장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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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27 0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노용석 2008.06.02 1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용석입니다. 늦게 가입해 죄송합니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 상당히 헤맸지요...
    그날 사진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하군요. 김기자님 마산 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최정기선생님께도 그날 감사드리고요....
    여하튼 모두들 조만간 볼 수 있도록 합시다..

'지공사'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일상기록|2008. 5. 23.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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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다운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그동안 은폐·왜곡돼왔거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현대사를 조사·발굴·연구·보도해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각자 자기지역에서 중요하고 의미로운 일을 해오시긴 했지만, 고립분산돼 있다보니 어려움과 한계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선 소박하게나마 이런 분들이 모여 작은 모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제안은 김주완이 했고, 연락은 박만순 님이 했습니다. 첫 모임의 자리와 비용은 최정기 님이 마련해주셨습니다. 비용은 공동부담하자고 했지만, 최정기 님이 극구 부담하시겠다고 하셔서 굳이 말리지 않았습니다. (ㅋㅋ)

2008년 5월 17일 4시에 전남대 사회과학대 부학장실에서 만나 간단히 회의를 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가칭)‘지역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모임 제안

1. 처음부터 거창하고 방만하게 시작하지 말자. 그냥 친목모임처럼 시작하여 차츰 할 일을 찾자.

2. 회원가입은 열어두되, 일부러 늘이려고 하진 말자.

3. 소통기반은 팀블로그(http://local-history.tistory.com/)로 하자.
  -회원은 팀블로그의 일원인 공동편집자가 된다.
  -회원 개개인은 자기 이름의 카테고리를 갖고, 자유롭게 자신의 자료와 공부 결과물을 올려 공유한다.
  -회원이 올리는 글 중 필요한 경우 다음블로거뉴스에 송고한다.
  -회원끼리의 소통은 ‘회원게시판’의 글과 댓글로 한다.

4. 할 일은 차차 논의하자.
  예) 각 지역별 관변단체 간부 신상 조사, 지역별 현대사 지도 만들기, 지역별 지방의원 출신직업 조사, 지역별 토호세력 조사...

5. 회비는 따로 없이 모임 때마다 공동부담하되, 소박한 재정사업도 병행한다.
  -블로그 에드센스 광고, 링크프라이스 광고
  -블로그 후원광고 유치
  -한국언론재단 언론인연구모임 지원금
  -공동기획출판 인세수입

6. 모임은 분기별로 한 번 정도 하되, 지역별로 순회 개최하자.

대체로 이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지역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약칭이 '지공사'라는 것도 대체로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박만순 님은 "느슨하게 하더라도 명확한 고민을 갖고 하자. 모임 때 뭔가 목표를 잡자"고 하셨습니다.

최정기 님은 "박만순 님이 청주에서 만들었던 현대사지도를 각 지역에서 만들어볼 수도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노용석 님은 "대구에는 골목지도도 있다.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이와 별도로 경산 코발트광산 조사 중에 '선광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다음 모임 때 내용을 발표할 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들 동의했습니다.

다음 모임은 여름휴가철 지나서 8월 말쯤 마산에서 갖기로 했습니다. 다음 모임에 추가로 초청할 분들을 박만순 님이 제안했습니다. 심규상, 최승호, 박병섭 님이었습니다. 역시 모두들 동의했습니다.

이후 박만순 님이 청주현대사 지도를 만들었던 과정과 의미, 효과 등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모두들 찬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곧 그날의 발제문을 박만순님이 올려주실 겁니다.)

그 후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갔습니다. 어떤 맛있는 걸 먹었는지는 곧 올리겠습니다. (최정기 님의 비용부담이 엄청났을 겁니다. 사모님에게 무사하셨는지 몰라~)

※ 다녀온 날 바로 정리해 올리려했는데, 게을러서 늦었습니다. 몇 일 지나고 나니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혹 제가 놓친 게 있다면 회원님들께서 댓글로 남겨주세요. 추가 또는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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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을 2008.05.23 1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사학 전공하는 학부생입니다 대학원 진학해서 현대사에 대해 좀 더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저도 이런 모임에 참석할 날이 오겠지요 헤헤

  2. 포비 2008.05.23 15: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놓치고 가는 현대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봅니다.
    역사 깊은 마산 골목지도도 준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987년 전두환 현상수배 벽보

역사기록|2008. 4. 26.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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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전사모)이라는 단체가 대구에 사무실을 내고 전두환기념관이라는 걸 만들겠다고 합니다.

전두환 범죄기록관 또는 만행기록관, 학살기록관을 세워도 시원찮을 판에 업적을 칭송하고 전승하자는 기념관이라니 가당치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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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21년 전, 6월항쟁이 들불처럼 번진 1987년 6월 10일 경남 마산의 시내 한 건물 벽에 붙어있던 현상수배 벽보가 있습니다.

이 벽보는 당시 한 신문기자가 시위현장에서 수거해 보관하고 있던 중 6월항쟁 20주년이 되던 작년에 저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시위 참여자 중 한 분이 매직으로 휘갈겨쓴 벽보는 당시 시민들의 전두환에 대한 증오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인 강간 폭행 사기 매국'이라는 죄명과 현상금으로 '직선개헌과 민주주의'를 드린다는 글귀가 재밌네요.

이 현상수배 벽보를 전사모라는 해괴한 단체에 선물로 드립니다. 다운받아 전두환기념관에 걸어두시면 어떨까요?
벽보 원본은 '전두환 범죄기록관'이 설립되면 거기에 기증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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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에효... 2008.05.23 15: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국노들의 자손은 교과서 새로 만들어서 이것이 공정한 역사라고 주장하고
    멀쩡한 사람들 몰살시킨넘은 절에 잠깐 들어갔다가 뒷돈 두둑히 챙겨놓고 편안하게 발뻗고 자고
    언제쯤 나라가 바로설꼬...

  3. Favicon of http://blog.daum.net/shtingstar BlogIcon 정생 2008.05.23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가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올릴 경우에는 출처를 알리고 올리겠습니다..
    올려서 문제가 생기게 되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
    아직도 빨갱이 타령하는 것들이 있네요...
    제가 보기엔 무지한 중생들이 현실을 못보고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아무것도 모른체 살아가는 하나의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네요....

  4. 현정권 2008.05.23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정권이 얼매나 무능하면 극악무도한 전 아무게가 이렇게 설치는 소리가 나올까 ....
    애꿋은 전라도 사람들 왜그랬데 .. 이제 애꿋은 전국 되는 현정권은 우짤란가...

  5. ㅋㅋㅋ 2008.05.23 15: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쓰레기가 포탈메인에 떠서 빨갱이들 광분하게 하고...
    빨갱이 개떼 니들이 아무리 짖어도..
    수천만의 정상인이 투표날 니들 응징한다...

  6. 벨제붑 2008.05.23 15: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 집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 있습니다.
    할머니가 계셨고 아버지는 농협에 근무하셨고 어머니는 농삿일, 형,누나,동생
    그해 80년 여름 전남대 다니시던 작은삼촌이 방학겸 농삿일 돕는다고 와 있었죠
    이른 밤 친구들과 술마신다고 큰길 신장로 막걸리집 간 삼촌은 아침이 되어도 안들어 왔고 부랴부랴 행방을 찾던 아버지는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연락을 받고 읍내로 찾아갔었댑니다,
    대학생이 늦은밤까지 술쳐먹고 길바닥에 오줌이나 싸고 다닌다면서 이런넘들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아버지에게 그냥 돌아가라 했답니다, 경찰서에 아버지 친구분도 계시고 해서 별일없을터이니 집에가서 기다리라고 2-3주 교육받고 금방 나온다고 그랬답니다,
    근데 1년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삼촌이 왔어요, 잠자다가 벌떡 일어서서 고함 지르기도 하시고
    귀신이 쒸었다고 할머니는 점쟁이 찾아 다니고 막 그러다가 동네 이목도 있고 하니
    정신병원에 보내자고 하더군요 그렇게 또 한두해 지났나, 자살 한다고 농약도 마시고 칼로 자해도 하고
    그 때 생각하면 ...끔찍,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마당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려 방을 봤더니 삼촌이 거품을 물고 누워있더군요, 할머니는 전남대학생 아들 자랑이 이만 저만 아니였는데 그 아들이 그렇게 죽었으니 할머니도 몇개월 동안 밥 잘 안드시더니 그렇게 돌아 가셨어여, 아버지는 홧김에 술만 마시면 경찰서 가서 난동 피우다 유치장 들어가시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시고, 휴~~~~~~~~~~~
    36나이에 다시금 옛 생각하며 글 쓸려니 감정이 북받치네,,,,
    여튼 한사람으로 인해 행복했던 내 유년시절이 완전 증오로 바껴 버렸습니다,
    인생이 바뀐거죠,,, 가끔 그때 만약 그 사람이 대통령이 아니였다면 우리 집안은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삼촌은 할머니 자랑처럼 판검사가 되었을까? 난 여유로운 가정 환경덕에 미술학원을 다닐수 있었을까?
    그래서 미대 진학을 했을까? 등등,,,
    여튼 누군가에겐 그 사람이 희망이였을지 모르나 나를 비롯 다른 많은 사람들에겐 그 사람은 불행을 안겨준 사람입니다,,,

  7. ㅋㅋㅋ 2008.05.23 15: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두환 장군님이 광주 폭동 진압 못했다면 니들이 여기서 인터넷이나 하고 있을까?

    • 왜???? 2008.05.23 1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 진압 안했으면?????

      인터넷도 못하냐????

    • 이런 개 뉴라이트 족속들 2008.05.23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군이란다~~

    • ㅆㅣ앙 댓글쓰게 만드네... 2008.05.23 1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군님이란다... 폭동 진압했단다...
      졸.. 모르면 꼬꼬댁이나 한대 치시고 가만히나 있지...
      그래 그래.. 니 말대로 폭동이라 치자!!!
      근대 그게 왜 그런지도 모르지?
      가만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
      젊은 나도 그 시절 그 얘기를 아버지한테 익히 듣고..
      관련서적과... 인터넷 글등을 토대로 어릴때 부터...
      알고 있었거든.... 모르면 닥.치시고 가만히 있으소~

  8. Favicon of http://synsophia.egloos.com BlogIcon 소피아 2008.05.23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컷 웃고 갑니다. 푸하하.

    근데 마지막 현상금 부분에서는 가슴이 찡하네요.
    마치 현 대한민국을 보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위에 빨갱이 운운하시는 분들,
    왜 전두환을 반대하면 빨갱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정확한 논거를 들어서 말씀해 보시지요.
    감정적으로 대응하시지 말고 말입니다.)

  9. zzzz 2008.05.23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두 두환이가 개명바기보단 잘 한듯.....

  10. ㅋㅋㅋ 2008.05.23 1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두환이 북괴군의 위협을 잘 막아 내서 적화통일을 막었기 때문에
    남한의 뇌없는 노사모 선동하는 빨갱이들이 제일 싫어하지...
    연결이 않되냐?
    니들 빨갱이들은 그래서 머리 나쁜거야...
    그래서 사회의 하층민 쓰레기 집단이고...
    뇌없는 노사모

  11. 멍멍이도안다 2008.05.23 15: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동네 멍멍이도 전두환이 뭐했는지 다 알드라. 아직도 전두환이 영웅이니 헛소리 하는 넘들 보면

    우리동네 멍멍이보다 못하단 생각뿐~~~ 전두환이 얼마를 횡령한지 아냐???

    그 뒷넘 노태우는 얼만지 아냐??? 당시 시세로 따져서 둘이 합치면 우리나라 전 국민 한달 내내 자장면

    실컷 먹을 수 있는 돈이야. 그것도 밝혀진것만 그렇지.

    그런데도 29만원 밖에 없다고 개솔 지껄이는 녀석을 영웅이니 뭐니 하는 네놈들은 천하의 사기꾼 공범집

    단이야. 횡령만하면 말을 안해. 그넘이 한짓보면 2MB의 앞날이나 거의 비슷할듯. 전두환이 조금 더 악질

    이면 2MB는 지능적인 사기꾼이라는거 밖에 차이가 없음~~~

    전사모=개집단

  12. 나 80년대생이야 2008.05.23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80년대 생이고 정확히 전씨가 무슨 짓을 했는지 "겪어"보지 못했어. 그런데 이거하난 확실해. 공수부대가 투입됐다고... 시위 진압할려고 공수부대가.........최소한 군생활 한 사람이면, 대한민국 남자면 알거야. 공수부대는 전시에 적진 한가운데 투입되서 요인암살 및 주요 시설 파괴가 목적이라고. 그런 공수부대가 시위 진압하는데 동원됐어. 암살할 사람도 없었고 tnt 터뜨릴 일도 아니었는데 투입됐다고. 경제발전 시킨 대통령...좋아..근데 이거하나만 확실히 하자. 사람 목숨위에 설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어.

  13. ㅋㅋㅋ/ 2008.05.23 15: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이 몇이나 쳐먹고 그러는줄은 모르겠다만 빨갱이빨갱이하지마라 역겹다

    빨갱이는 사회선동하는새끼들이 빨갱이아니냐?

    사회선동하는건 너로보이는데?

    뭐같은자식아 니말이 정녕 옳다생각되면 시내 한복판에서 전두환장군님 하면서 찬양이나해봐라

    니 몰골이 어찌될찌 궁금한데?

  14. ㅋㅋㅋ 2008.05.23 15: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빨갱이들 많네...

    길거리에서 개떼같이 덤비는 빨갱이들은

    내가 다 대가리 깨부숴 준다...

  15. ㅋㅋㅋ 2008.05.23 1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똑바로 들어
    현재는 속아서 빨갱이라도 사태만 정확하게 파악하면 잘잘 못을 가릴수 있어...

    자세히 모를때는 대강 이야기해서
    공수부대가 총쏘면서 광주 시민을 죽였기 때문에 그것에 항쟁한다고 우겨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광주 폭도들이 사람들 선동해서 서로 죽이고 광주 시민을 못살게 굴고
    광주의 폭동이 성공하면 전국에서 봉기하고 위로는 김일성이 땡크몰고 내려와서..
    남한을 적화 통일하려고 했기 때문에..
    공수부대가 진압 하려고 투입된것이고...(보병부대는 방어 부대고 대포쏘고 땡크쓰는 부대이고)
    (공수부대는 맨몸으로 몽둥이하나들고 진압하는 부대야)
    그 공수부대를 폭도들이 버스로 깔아뭉개고 아세아 자동차 장갑차로 깔어 뭉개고
    경찰서및 광산에서 훔쳐온 총 , 다이나마이트까지 사용면서 군경을 죽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총쏘면서 진압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야...

  16. 페스탈로찌 2008.05.23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18때문에 그러시는 모양인데 넘 심한 글들이다.오일팔은 시민들이 유도한면도 적지 않다.버스로 깔아 뭉갤 기세에 후진하는 장갑차에 부대원이 깔려서 처참하게 죽었는데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사람들도 무지 많이 구경하던 찰라에 그렇다고 하더라 군인들도 수십명 죽었고 하여간 그래도 어린시절 즉 80년대를 돌이켜 보면 좋은 추억들이 많았다 아시안게임 올림픽 그리고 수많은 애국노래들.나라의 국운이 승천하던 시절이었는데.그때의 지도자를 너무 매도하는건 아닌지.지도자는 결과로 평가해야 되는것 같다.사회가 다 그런거 지만 공수부대가 안간 주요 도시는 없었다.서울도 그렇고 부산도 그렇고 오직 그곳에서만 유혈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오직 그때 그 사람들만 알 것이다.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지 최상위층 몇몇이 책임져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17. 개대중 2008.05.23 15: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의 사리사욕 채울려고
    지역감정 만들어 좁은 땅덩이 남북도 모자라
    동서로 갈라 놓은 개대중이의 죗값은 죽기전에 반드시 치루게 해야 한다.
    그리고 폭동인 항쟁인지 진압하려다가 죽은 사람수하고,
    개대중이 시절에 경제 망쳐 자살한 사람수하고 누가 더 많을까?

  18. 개대중 2008.05.23 15: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버스로 경찰 깔아 뭉개고,
    경찰서 습격해서 무기 탈취해
    관공서 습격하는데
    그냥 가만 두리?
    그당시 웃기 유언비어하나!
    "곧 미군이 개입한다"
    ㅋㅋㅋㅋ
    미친 또라이들!

  19. ㅋㅋㅋ 2008.05.23 15: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은 일년에 만오천명이 자살합니다...
    개대중 노구리의 코스닥 사기 , 하이닉스 사기 , 로또 사기 , 강원랜드 사기 , 등등등 !!!

  20. 겨울산 2008.05.23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대가리 학살 기념관이라...괜찮군...내가 초대 관장으로가서 전대가리의 천인공로할 만행을 자자손손 만대에 기념하기 위한 기발한 전시기획을 해보지요

  21. 안산유부남 고양이 2008.05.23 2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대중님 ㅋㅋㅋ님
    당신들의 의견은 충분히 읽어보았습니다만

    역사적으로 볼때 당신들이 하신말씀은 한낮과거의 집착에서 비롯된것이며 일명 "토끼 길들이기"
    전두환이가 이야기한 무뇌한서민 길들이기 정책으로 말미암아 논리적이지못한 단순한 충성적 의견으로 보입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라하는데 빨갱이타령을 하며 매도하는것역시 근거가 부족함과 단지 과거와
    집안교육 분위기에서 배어나온 노예근성으로 주인에게 충성을 단순무지한 행동이며 발언입니다

    한나라당이 나라 말아먹고 imf 터지고 나몰라라 도망갈때 나라를 살린 사람들은 누구인지요

    피똥싸며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졸지에 거지가 될나라를 간신히 구제를해주었더니
    그들때문에 자살했다고요?

    자살한분들에 대한 명예회손이며 온국가가 힘들게 이룩해온 업적을 부정하는 망언이 아닐수없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분들을 돌아가게 만든것인 지금 이정권을 잡고 또다시 나라를 망치려하는 그들의 에게 화살을 돌려야 할것입니다

    아..
    혹시 토끼 길들이기 잘모르실듯하니 간단하게 설명드리고자합니다

    토끼를 꼼짝달싹 못하게 바닥에 묶어둡니다 그리고 몇칠을 굶기다
    바로 코앞에 먹이를 두는것이죠 허기와 스트레스로 괴로와하던 토끼는 먹을것을 먹기위해 바둥대지만
    지켜갈뿐이랍니다 그렇게 몆시간이고 방치를 하다 토끼가 더이상 반항을 하지못할정도가 되면

    토끼가 보이는앞에 나서서 직접 밧줄을 풀어주고 손수 먹이를 주기 시작합니다

    그럼 토끼는 앞선 고통과 학대를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신을 구해준 그사람을 따른다는것이죠
    이게 토끼 길들이기 입니다 예전 박정희,전두환,지금의 이명박이가 하고있는 행위와 다를바 없는것입니다

    당신들도 피해자이기에 심심한 위로를 드리는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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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개인의 매수세가 한국증시를 지탱했다. 연기금은 오늘도 줄창 팔았고, 금융투자는 사다 팔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거래금액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개인이 코스피에서 2300억 원 매수한 덕에 +0.27%로 마감했다. 내 보..

미국 ETF가 많은 연금저축계좌만 올랐다

기관은 코스피에서 계속 팔기만 한다. 외국인은 샀다 팔았다 하기도 하지만, 기관은 줄창 매도다. 오늘도 그랬다. 반면 코스닥에서는 기관과 외국인이 동반 매수했다. 거래량도 많지 않았고, 여러 모로 재미 없는 장이었다. 내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