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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민간인 집단학살 구술증언록(1)

학살기록|2013. 5. 1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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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009년 함양군 지역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관련 구술증언록이다.


면담자는 김주완이며, 증언자는 총 21명, 총 291쪽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이다.


파일이 36메가바이트에 달해 나눠싣는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구술증언록 목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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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주신문건설추진위 건설팀 내부 계획

창간기록|2013. 4. 2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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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주신문 경남매일 건설추진준비위원회를 1998년 11월 12일 발족한 다음날 '도민추건설팀'에서 작성한 문건이다. 이 팀은 이후 '기획홍보팀'으로 확대 개편된다.

  

 -위원장 구주모

 -위원 김진규 김병태

 -총괄팀장 정우영

 -회사설립팀장 최춘환

 -도민추건설팀장 김주완

 -경영연구팀장 김현식



K2.HWP



도민추 건설팀 업무계획
1998. 11. 13
김주완

1. 팀장-김주완

2. 팀원-이원정, 김효영

3. 업무계획 및 일정

  1) 도민주신문경남매일건설추진위원회 발족 당위성 공유
     -13일(금) 기존 문건과 회의를 통해 공유
  2) 발기인 모집대상 명단작성
     -13일(금) 오후 이원정이 컴퓨터로 작성(이름 나이 직업 주소 설립자금 납부액 집전화 직장전화 휴대전화번호 추천인)
  3) 도민주신문경남매일건설추진위원회 설립추진위원 참여동의서 도안 및 인쇄
     -13일(금) 오후 김효영이 도안(김주완이 참고자료 제공)
     -16일(월) 인쇄소 위탁
  4) 추진위원 모집을 위한 사원설명회 준비
     -모집대상, 모집방법, 모집기간, 모집조건등 확정
  5) 추진위원 접수
    -이원정이 접수(명단, 주소,연락처, 동의서)
  5) 도민주신문 건설을 위한 간이 계획서(팜풀렛형태) 작성
    -종합계획서의 의거, 김주완이 작성, 팜플렛으로 인쇄
  6) 도민주신문경남매일건설추진위원회 창립선언문 초안작성
    -김효영이 초안제출
  7) 도민주신문경남매일건설추진위원회 임원, 조직 내정
    -김주완이 지도자급 발기인들과 준비위간담회를 통해 내정
  8) 도민주신문경남매일건설추진위원회 발족식 준비
    -장소섭외, 장비준비, 발족식 순서, 참석대상자 연락, 신문광고,
     발족식 팜플렛 제작 

4. 다른 팀에 대한 협조요청사항

  1) 새법인 설립 및 도민주 모집방식 확정
     -발기설립? 모집설립? 설립완료 일정, 정관내용, 발기인 명단등
     -법률적인 주주모집 준비 완료일정
  2) 도민주 신문 건설을 위한 종합계획서 작성
     -법인 설립방안, 도민주 모집방안, 시설기자재 확보방안, 새신문
      경영계획(인력, 조직, 제도, 수지계획), 정관의 주요내용, 새신문의 편집방향등
     -각 팀별로 계획서 작성제출, 취합
  3) 도민주 신문 건설을 위한 창간자금 산출
     -법인설립 비용, 시설기자재 확보 비용, 사옥확보 비용, 일정기간동안의 신문발행 비용, 임금산정등
     -최춘환, 김현식이 공동작성
  4) 추진위원 모집 대상자 명단 제출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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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에 학살당한 독립운동가

학살기록|2013. 4. 2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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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이었다. 60대 후반의 한 어른이 나를 찾아왔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했다는 안인영(당시 69세) 씨였는데,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찾고 싶다"고 했다. 내가 민간인학살 등 지역현대사의 은폐된 진실을 계속 취재해 보도하는 걸 보고 "이 기자에게 부탁하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창원 상남면 퇴촌리 출신 안용봉(1912~1950)이란 분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경찰에 끌려가 재판 절차도 없이 창원 삼정자동의 한 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


아들 안인영 씨.

아버지 안용봉 선생의 젊은 시절.


해방된 지 2년 되던 그 해 창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2주년 기념식장에서 연사로 나온 아버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옷을 입고 계셨지요. 당시 35세셨던 아버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수많은 청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직도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은 맞았으되 이는 완전한 해방이 아닌 껍데기 해방일 뿐입니다.' 아버지 이 한 마디에 수많은 청중들이 떠나갈 듯 박수를 쳤지요.”


그의 아버지는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고, 그 때문에 정권의 감시를 받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끌려가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개의 학살 유족들이 그랬듯 '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이 두려워 이런 사실을 평생 자식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다 정년퇴임을 했고 "내가 죽기 전에 아버지의 명예를 꼭 회복시켜 드리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다행히 안용봉 선생의 기록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와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를 통해 일제의 재판 기록과 복역 기록을 찾아냈다.


2005년 부산경남사학회 학술대회.


마침 그해 6월 부산경남사학회가 주최한 ‘한국전쟁 55주년 기획발표-한국전쟁시기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문제’ 학술발표대회가 열렸다. 그날 나도 ‘보도연맹원 학살과 지역사회의 지배구조-경남 마산지역의 사례와 인물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는데, 아들 안인영 씨는 청중석에 끝까지 앉아 발표를 지켜봤다. 70의 나이에 다시 역사 공부를 시작한 셈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재판기록과 학살당했다는 증언 등을 첨부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지정을 신청했고, 이듬해인 2006년 8월 광복 61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아 독립유공자가 됐다. 아버지의 명예가 공식 회복되는 날 아들 안인영 씨는 기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이 이렇게 나쁜 인간인줄 정말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역사를 찾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새롭게 쓰이고, 반드시 다시 정립돼야 한다는 사실을."


그 후 창원시 동읍 국도를 지나다 낯익은 이름이 적힌 표지판을 발견했다. '애국지사 안용봉 선생 묘지'였다.







2006년 안용봉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확정되었을 당시 내가 썼던 칼럼을 첨부해놓는다.


아들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한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자랑스러운 항일 경력을 철저히 비밀로 간직해왔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에게도 그런 사실을 숨겼다. 비밀은 그의 나이 70에 이를 때까지 수십 년 간 이어졌다.


자랑스러워해야 할 독립운동 전력을 왜 그렇게까지 숨겼을까. 그건 부친이 해방 후 권력을 잡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국지사 안용봉(1912년생) 선생과 그의 아들 안인영(70·마산시 내서읍)씨의 이야기다.


안인영씨는 해방 후 2년이 되던 1947년 광복절 당시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 해 창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2주년 기념식장에 연사로 나온 아버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옷을 입고 계셨지요. 당시 35세셨던 아버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수많은 청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직도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은 맞았으되 이는 완전한 해방이 아닌 껍데기 해방일 뿐입니다.' 아버지의 이 한 마디에 수많은 청중들이 떠나갈 듯 박수를 쳤지요."


당시는 이승만과 미국이 강행하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로 몰리던 분위기였다. 제주 4·3학살도 그래서 자행된 것이었다. 이듬해인 48년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만의 5·10 총선거가 치러진다. 아들은 그 때의 상황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독립운동 경력이 '비밀' 


"당시 창원 죽전 정미소에서 투표가 있었지요. 그 때 아버지께서 어린 저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아들아, 이 선거는 해서는 안 될 선거다. 우리만 선거하면 남과 북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걸 보면 얼마나 울분에 차셨으면 그러셨겠나 하는 생각이 지금 와서야 드는군요. 못난 아들이 지금에야 아버지의 큰 뜻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새겨놓은 사부곡.


알다시피 백범 김구 선생도 당시의 단정 수립을 반대했다. 마산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이 47년 2월 7일을 기해 '구국투쟁'을 벌이면서까지 단정 반대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제주도와 여순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헤아릴 수 없는 대량학살을 자행한 끝에 집권한 이승만은 단정반대에 나섰던 인사들이 눈엣가시였다. 결국 백범은 의문의 암살을 당했고, 안용봉 선생과 같은 분들은 이승만 정권의 상시적인 감시를 받는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에 강제가입하게 된다.


이승만의 정치적 보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그들을 '적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붙여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산골짜기로 끌고 가 모조리 죽여 버린 것이다. '골로 간다'는 말이 곧 죽음을 뜻하게 된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애국지사 학살한 정권 


일제는 항일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시켰지만 이승만처럼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정치적 반대자들을 죽인 것으로도 끝난 게 아니었다. 희생자의 가족들에게까지 '연좌제'의 굴레를 씌워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고, 자식들의 취직까지 철저히 제한했다. 60년 3·15와 4·19혁명으로 살인자 이승만이 물러나자 전국의 유족들이 진상규명운동에 나섰고, 당시 국회도 여기에 동참했지만, 이듬해 다시 총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그들 유족까지 다시 감옥에 집어넣었다. 유족들이 발굴해 안장한 희생자의 무덤도 다시 파헤쳐 유골을 여기저기 흩어버렸다. 부관참시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이런 공포의 세월이다 보니 안인영씨가 부친의 독립운동 사실을 자식에게도 숨겨왔던 건 당연했다. 당시의 희생자 유족들 대개가 이렇다. 보통 이들 유족은 정권에 대한 피해의식의 가역반응 때문인지, '보수·우익적 가치관'으로 무장해 있는 분들이 많다. 지난해 처음으로 선친의 비밀을 털어놓고 과거를 찾아 나선 안씨를 만났을 때도 기자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어제, 학살된 지 56년 만에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포장을 받게 됐다는 통보를 받은 그는 기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아버지의 역사를 찾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새롭게 쓰이고, 반드시 다시 정립돼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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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지리산 결사대' 사건의 진상

역사기록|2013. 4. 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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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8월 20일 <경남도민일보>에 '10년만에 다시 쓰는 취재기'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한국언론의 가장 추악한 오보로 기록된 만한 사건에 대해 바로잡는 취지에서 썼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는 1991년 경상대 ‘지리산결사대 사건’으로 실형을 살았던 빈지태씨(34.당시 경상대 경제학과)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했다. 10년전 ‘빨치산과 일본 적군파를 모방한 극렬운동권의 소수 전위부대’라는 딱지를 선사받았던 이 사건이 10년만에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게 된 사연은 무었일까. 당시 지역주간지 기자로 유일하게 현장에 있었던 기자의 취재기를 통해 이 사건의 진상을 알아본다.


1991년 10월 10일 오후 4시 30분쯤이었다. 기자가 급히 택시에서 내려 진주시 하대동 진주전문대(이후 문산읍으로 이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40여명의 경상대생들이 C동 101호 강의실에서 꿇어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에 앞서 기자는 진주전문대 총학생회장 선거를 앞두고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을 몇일 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맞붙게 된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과정에서 주로 여학생들로 구성된 운동권측 선거운동원들이 상대측 운동원들로부터 숱한 폭언과 협박에 시달려왔던 것. 이에 따라 운동권측 선거운동원들은 “강간을 해버리겠다”“너희가 선거에 이기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공공연한 협박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거분위기는 줄곧 운동권측에 유리하게 진행됐고, 이날 투· 개표가 끝날 4시쯤에는 운동권측의 당선이 거의 확정적이었다.(실제로 이날 투표결과 200여표차로 운동권 후보인 천재동(당시 24세)씨가 당선됐다.)


이같은 상황을 예감하고 있던 기자는 4시쯤 진주전문대에 전화를 걸었다. 평소 취재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교지편집위원회나 학보사를 바꿔달라고 했더니 교환원이 머뭇거리며 “지금 통화가 안될 겁니다”고 하는 것이었다. 퍼뜩 스치는 게 있어 “싸움이 났죠?”하고 넘겨짚었더니 그렇다는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이 학교로 가는 동안 기자는 흔히 일어나는 투표함 탈취 등 개표방해사건을 연상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본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강의실 바깥에는 수많은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몰려와 있었고, 강의실 안에서는 각목을 든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비운동권 후보측)이 기세등등한 자세로 꿇어앉은 경상대생들의 ‘군기(?)’를 잡고 있었다. 고개를 들거나 자세가 흐트러질 경우 거침없이 발길질과 각목세례가 가해졌다.


이런 와중에 누가 연락을 했는지 후문 담장 바깥엔 경찰의 ‘닭장차’가 도착했다. 이 학교 교수· 학생들과 경찰이 모종의 협상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강의실에 ‘감금’당해있던 경상대 학생들이 예의 각목을 든 청년들의 감시를 받으며 머리에 양손을 올린 채 ‘오리걸음’으로 줄줄이 끌려 나왔다.


기자는 보기드문 이 광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열심히 눌렀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던 중 누군가가 “저새끼 뭐야”하고 고함을 질렀다. 순식간에 건장한 학생 10여명이 거친 욕설을 하며 기자를 에워쌌다.


“너 누구 허락받고 사진찍는거야.”

“취재기자인데요.”

“이새끼 지랄하고 있네. 죽으려고 환장했구만.”


순간 누군가가 카메라를 휙 나꿔챘다. 기자는 죽을 힘을 다해 카메라 어깨끈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한꺼번에 달려드는 청년들의 완강한 힘에 도리없이 카메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학생이 담벼락을 향해 카메라를 힘껏 던지려던 찰라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 학교 교수가 달려와 학생을 만류했다. 그는 흥분한 학생을 설득한 끝에 필름을 꺼내 학생에게 넘겨준 후 빈 카메라만 기자에게 돌려줬다.


이 과정에서 끌려나온 경상대생들은 후문 담장 바깥에서 대기중이던 ‘닭장차’에 고스란히 인계됐다. 이렇게 연행된 학생은 33명.


상황이 종료된 후 기자는 처음부터 현장을 목격한 학생들을 상대로 취재를 시작했다.


선거 하루 전인 9일 진주전문대 선거유세 과정에서 양측 후보 지지자들간에 욕설과 폭언 등 다툼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진주·충무지역총학생회협의회(진충총협· 의장 이일균 경상대총학생회장)에 접수됐다.


이튿날인 10일 오전 진충총협은 이 학교 선거개표 후 폭력사태가 예상된다며 급히 경상대에서 사수대를 모집, 40여명을 진주전문대에 파견했다. 40여명의 경상대생들은 이날 오후 3시30분께 진주전문대에 도착, 개표장과 떨어진 강의실에서 이 학교 학보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4시께 운동권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정될 무렵, 갑자기 강의실 유리창이 깨지면서 앞문과 뒷문으로 15명 가량의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경상대생 중 한명이 비닐봉지에 싼 최루가루를 뿌렸고, 몇몇 학생이 강의실 밖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바깥에 있던 수많은 진주전문대생에게 포위당해 이들 역시 제대로 저항도 못해본 채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경상대생들은 천막가방 속에 넣어 간 쇠파이프를 미처 꺼낼 사이도 없이 모두 빼앗겼으며, 각목과 책상, 빼앗긴 쇠파이프 등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완전히 제압당한 경상대생들은 강의실에 꿇어앉은 채 진주전문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이 학교에 들어온 경위 등에 대한 진술서를 썼다. 이 진술서와 쇠파이프· 최루탄 등은 모두 ‘증거품’으로 경찰에 인수인계됐다.


당시 기자는 재직중이던 <남강신문>(이후 진주신문으로 통합)을 통해 ‘언론보도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진주전문대 사태에 대한 보도를 보고’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의 진상을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일간지는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지리산결사대' 사건 당시 언론의 왜곡보도 살펴보니


기자가 현장에서 목격한 바와 같이 이 사건은 운동권 후보의 신변보호를 위해 진주전문대에 들어가 대기중이던 경상대생들이 오히려 비운동권측 지지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다. 따라서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경상대생들은 피해자쪽에 가깝다. 물론 이들이 쇠파이프와 불발최루탄 등 무기를 소지하고 남의 학교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폭력혐의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쌍방폭행이 돼야 옳다.


그러나 경찰의 발표는 전혀 달랐다.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보도한 <동아일보> 11일자 사회면 기사를 보자.


“10일 오후 5시반경 진주시 하대동 진주전문대 201호 강의실에서 진행된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개표장에 경상대 써클인 지리산결사대 소속 유형민군(19.경상대 무역과 1년) 등 대학생 33명이 쇠파이프와 최루탄을 갖고 들어가 20여분동안 난동을 부렸다. 경상대생들은 진주전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 후보인 천재동군(19.전자계산과 1년)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 강의실 유리창 2장을 깨고 들어가 최루탄 1발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 기사는 짧은 2개의 문장 대부분이 오보로 구성돼 있다. 사실보도의 구성요소를 6하원칙이라고 할 때 이중 사실과 부합되는 것은 단 한가지도 없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언제(when)에 해당하는 ‘오후 5시반경’이 틀렸다. 학생들간에 충돌이 일어난 시간은 오후 4시께였다. 또 어디서(where)에 해당하는 장소도 틀렸다. 경상대생들은 개표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개표장과 다른 101호 강의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누가(who)에 해당하는 난동과 폭력을 주체도 오히려 뒤바뀌었다. 무엇을(what), 어떻게(how)에 해당하는 행위도 잘못된 것이다. 주체가 바뀌었으니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두른 행위도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다. 이유를 설명하는 왜(why)도 마찬가지다. 기사는 ‘운동권후보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심지어 천재동 후보의 나이도 안맞다. 그는 1학년이었으나 늦깍이 입학으로 실제나이는 24세였다.


이처럼 사실관계에서 오보투성이인 기사가 당시 모든 언론에 그대로 보도됐다. 조선.동아.중앙 등 전국일간지의 경우 취재기자가 진주에 없어 일방적인 경찰발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현지에 많은 취재기자를 두고 있는 지역일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신경남일보><경남신문><경남매일> 등 3개 지역일간지도 모두 경찰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 뒤였다. 당시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언론노보 10월 21일자는 이렇게 폭로하고 있다.


“문제가 된 것은 14일. 이날 진주경찰서는 ‘지리산결사대’ 관련 보도자료를 진주 및 경남도경 기자실에 보냈다. 첫 보도때 이미 단추를 잘못 끼운 연합통신 진주주재기자가 또다시 확인없이 경찰측 보도자료를 그대로 기사화해 본사로 송고했다.(…중략…) 이날 오후부터 서울에 있는 지방담당데스크들이 일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연통기사를 서비스받은 이들은 ‘이렇게 좋은 재료를 왜 안보냈느냐’는 투의 전화를 해당지역에 했다. 이에 따라 경남주재 중앙지 기자들은 별다른 확인과정없이 경찰측 보도자료를 근거로 첫 보도겸 ‘결사대’ 속보를 작성해 본사로 송고했다.”


이에 따라 전국일간지와 양 방송사 등은 ‘폭력투쟁 앞세운 운동권 전위 / 경찰이 밝힌 ‘지리산결사대’ 정체’ ‘극렬.소수화 운동권의 전위대 / 경상대 ‘지리산결사대’의 정체’ 등 특집 해설기사 등을 일제히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같은 언론의 앵무새같은 보도에 힘입어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은 이들 경상대생 18명에게 대부분 폭력혐의를 인정, 유죄선고를 내렸다. 물론 진주전문대 학생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모두 19명 기소돼 유죄판결...6명은 실형


10년 전 노태우 정권 당시 학생운동 탄압을 위해 확대.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지목되고 있는 ‘지리산결사대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당시 이 사건으로 구속기소돼 실형을 받았던 빈지태씨(34.당시 경상대 경제학과)가 최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인정 통보를 받은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경상대 민주동문회(회장 이영주) 등 관련단체와 당시 학생들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킨 것은 물론 학생운동권을 빨갱이로 덧칠하고 무시무시한 폭력집단으로 매도한 이 사건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지리산결사대 사건’은 지난 91년 10월 10일 진주전문대 총학생회장 선거와 관련, 이 학교 운동권 후보측의 신변보호 요청에 따라 강의실에서 대기중이던 진주.충무지역총학생회협의회(진충총협) 소속 경상대 학생 40여명이 비운동권 후보측 학생들에 의해 경찰에 인계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경상대 학생들은 진주전문대의 특정후보측 학생들로부터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반면, 경찰은 오히려 이들 운동권 학생을 ‘타 학교에 난입, 난동을 부리고 폭력을 행사했다’며 폭력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에 따라 당시 19명이 기소돼 이중 6명이 1년~3년8개월의 실형을 받았으며, 나머지 13명도 집행유예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및 일부 지역일간지는 경찰의 일방적인 발표를 그대로 보도하면서 ‘빨치산의 후예를 자처하는 학생들이 대대.소대.분대 등 군대조직을 갖춰 지리산에서 화염병투척훈련을 해왔다’며 이를 용공이적단체로 매도했으며, 난입.난동.폭행혐의에 대한 확인취재도 전혀 하지 않아 언론계 내부에서마저 ‘발표저널리즘에 따른 대표적 오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현재 함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빈지태씨는 “조선.동아일보 등 주요언론에서 우리를 비밀폭력조직이나 이적단체로 매도하는 바람에 한동안 경상대생 전체가 취업에 큰 불이익을 받았으며, 전국 모든 대학의 사수대가 폭력조직으로 된서리를 맞았다”면서 “이 문제는 한 개인의 명예나 보상의 차원이 아니라 당시 경상대와 한국 학생운동의 명예회복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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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매일 복간준비위원회 보도자료

창간기록|2013. 4. 2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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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도민주신문 경남매일 건설추진위원회'가 12일 발족된 후, 대외적으로 나간 첫 보도자료가 있었다. 14일 작성된 이 보도자료는 '경남매일복간준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 당시 '경남매일 복간이냐, 새로운 도민주 신문 창간이냐'로 내부 논란이 적지 않았는데, 그로 인해 추진 주체의 이름에도 혼란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 김주완이 홍보 업무를 맡아 보도자료 작성과 배포를 담당했는데, 이 보도자료에 자신의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를 기입한 걸 두고, 한참 뒤에 이런 저런 구설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보도자료에 담당자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재하는 게 일반화하지 않았는데, '개인을 스스로 부각하려 한 게 아니냐'는 뒷말이 제법 있었다는 것이다.




보/도/자/료

경남 창원시 팔용동 26-10 경남매일복간준비위원회 전화 0551-250-0130~1  김주완 011-572-1732


경남매일 도민주신문 건설 추진

-사원 70여명 복간준비위 구성…발기인 모집


 지난달 31일 지령 3,000호를 끝으로 종간한 경남매일이 최근 사원들을 중심으로 복간준비위원회(위원장 구주모 전 사회부 차장)를 구성하고 도민주신문 건설을 위한 발기인 모집에 나섰다.


 개혁적 성향의 젊은 기자와 사원 등 70여명이 참여하고 있는 복준위는 우선 1억원의 사원출연금으로 법인설립자금을 마련한데 이어 13일 창원시 팔용동 구 사옥 2층에 복간사무국을 열고 발기인 모집에 들어갔다.


 복준위는 1,000여명의 발기인 모집이 완료되는대로 이들 발기인과 함께 도민주 신문 건설을 위한 범도민기구를 발족, 본격적인 도민주 공모에 돌입할 계획이다.


 이에앞서 복준위는 지난 9일부터 부서별 간담회를 거쳐 새 신문의 성격을 ‘참여와 자치를 통한 도민공동체 건설을 지향하는 개혁적 지역 정론지’로 설정하고, 지역언론의 신기원을 여는 도민주 신문 건설에 각계의 동참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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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주신문 창간 내부용 제안문

창간기록|2013. 4. 2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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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13일 작성된 문서다. 일지와 비교해보니 '도민주신문 경남매일 건설추진준비위원회'가 12일 발족되고, 13일 준비위 업무가 개시된 날이다. 당시 준비위 구성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구주모

-위원 김진규 김병태

-총괄팀장 정우영

-회사설립팀장 최춘환

-도민추건설팀장 김주완

-경영연구팀장 김현식


이 문건은 준비위 업무를 개시하면서 내부 결속용으로 김주완이 작성한 것이다. 아직까지 준비위 참여를 망설이고 있던 옛 경남매일 구성원들에게 동참을 권유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인지 치기도 좀 엿보인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K4.HWP


처음엔 '도민주신문 경남애일 건설추진준비위원회'로 시작하였으나, 이후 '경남 도민주주신문 창간추진위원회'로 바뀌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아무도 해보지 못한 일,

지금 우리가 뭉치면 할 수 있습니다!!


지역언론의 혁명이 지금 시작됩니다.

경남최고의 벤처언론사가 곧 탄생합니다.


진짜 제대로 된 지역신문 하나!

우리가 만들어 봅시다.


경남에선 왜 도민주 신문이 생기지 못했던 걸까요.

그건 경남지역의 신문쟁이들이 아무도 그 일을 추진하고 나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겨레신문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운동권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신문쟁이들이 만들었습니다. 동아 조선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신문사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글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글쟁이들은 제대로 된 신문을 하나 만들어보겠다는 일념에 미친 나머지 세계최초의 국민주신문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때 국내 언론계에서는 모두들 안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한 중앙일간지 편집국장은 ‘그 신문사가 창간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순진한 투지만으로 뭉친 글쟁이들은 마침내 한겨레신문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한겨레신문은 돈많은 언론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경영사정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IMF의 거센 한파 속에서 수많은 언론사가 부도위기에 처해있는 가운데서도 한겨레신문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건 국민주신문이기 때문입니다. 6만명의 소액주주가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주신문 남해신문 해남신문 홍성신문이 지금까지 탄탄한 경영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모두 시민주, 군민주로 만든 신문이기 때문입니다. 진주신문은 진주의 민교협 소속 교수들과 전교조 교사들 수십여명이 모여 만든 신문입니다.


요즘 다시 이런 언론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신문이 아니라 방송입니다. 국민주방송은 방송경력자나 전문가가 한명도 없는 상태에서 시민단체 사람들만을 중심으로 지상파 종합방송국 설립을 추진중입니다. 이들은 전국의 각 지역별로 1인당 50만원을 내는 발기인을 모집한 후 이들 발기인을 중심으로 300억~500억원에 이르는 방송국 설립자금을 모으려 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이들에게 방송국 허가를 내 줄지, 안내줄 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 사람들도 그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모으는 일과 방송국 허가를 따내는 두가지 큰 문제를 동시에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둘 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놓고 2차례에 걸쳐 전국단위의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지역일간지인들 못할 게 뭡니까.


우리는 이들보다 훨씬 쉬운 위치에 있습니다. 60명이 넘는 정예인력이 이미 준비돼 있습니다. 도민주신문에 걸맞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스스로 포기하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신문등록은 간단합니다. 일정한 요건만 갖춰 문화관광부에 등록만 하면 됩니다.


한겨레신문은 인쇄소용 고물 윤전기(하마다) 한 대를 매입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지만 우리에겐 쉽게 헐값으로 인수가능한 윤전기가 설치까지 완료돼 있습니다. 한겨레신문은 제판, 조판기기를 해외에 발주하여 들여왔지만 우리는 바로 구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이들 기자재를 헐값으로나마 인수할 수 있는 1~2억여원의 자금만 있으면 됩니다. 그정도의 자금은 지금 당장이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사원 10여명이 단 일주일만에 5,000만원을 모았습니다. 이 돈은 곧 1억원으로 불어날 예정입니다.


신문발행에 필요한 모든 시설은 2억원이면 떡을 칩니다. 사옥도 현 건물을 임대하면 됩니다. 그게 안되면 허름한 창고하나만 빌리면 됩니다. 그러고 나서 일정기간동안의 운영자금만 확보하면 됩니다. 그것도 5억원이면 충분합니다.


무차입경영, 최소규모의 정예인력이 만드는 가장 알차고 확실한 신문, 1만여명의 주주가 떡 버티고 있는 힘있는 신문, 떳떳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기죽을 필요가 없는 당당한 신문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이건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서면 모두들 따라옵니다.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런 시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림이 길었을 뿐입니다.


자! 이제 시작합시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우리의 젊은 패기를 활짝 발휘해봅시다.

우리가 안하면 누가 합니까.

지금 안하면 언제 합니까.

10년후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시다.

우리나라에 진정한 지역언론의 효시를 내가 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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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매일 재건전략과 도민주 공모 방안

창간기록|2013. 4. 20.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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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11일 김주완이 작성한 문건이다. 최초의 제안서였다. 당시 '훈민정음'에서 작성한 문서였다. 다행히 한글hwp로 전환이 되어 복구가 가능했다.



K1.hwp



차례는 이렇다.


1. 왜 도민주인가

  (1) 사원출자금액만으로 우선 신문발행을 재개한다고 볼 때

  (2) 대자본 영입을 우선 추진하고, 추후 사원주와 도민주를 결합할때

 2. 도민주 모집방안

  (1) 머리말

  (2) 도민주 공모의 전제

  (3) 도민주신문 건설추진위 발족 필요성

  (4) 재건추 조직정비 필요성

  (5) 한겨레신문의 경우

  (6) 범도민 추진위 건설방안

  (7) 범도민 추진위 건설일정

  (8) 범도민 추진위 조직구성 조직표




1. 왜 도민주인가


  신문사를 설립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법인설립에 따른 법정비용 5,000만원 정도는 사원들이 우선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그 신문사가 자생력을 가지고 신문발행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억여원(이 비용의 산출근거는 최춘환기자가 별도로 제시할 것임)정도의 자본금이 필요하다.

 현재 상황에서 이 돈을 마련할 방법은 △사원출자와 △도민주 공모 △대자본 영입등 3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사원출자금액만으로 우선 신문발행을 재개한다고 볼 때


 가. 사원출자 가능금액 및 출자시기


 우선 사원출자 가능규모를 생각해보자. 당장 1인당 300만원씩 20명이 현금출자를 하면 6,000만원이 된다. 이 돈으로 법정자본금 5,000만원을 충당하고, 나머지 1,000만원은 각종 비용으로 쓴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음 단계로 사원대표단에서 확보한 미수채권 분배금액을 출자하는 것이다. 1인당 100만원씩 최소 20명~최대 50명이 출자하면 2,000~5,000만원이다. 이 역시 일부는 각종 비용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자본금으로 확보한다.

 세 번째 단계로 근로복지공단에서 3개월후 지급될 예정인 체당금을 자본금으로 확보하는 방안이다. 이때 1인당 300만원씩 최소 30명~최대 50명이 출자하면 9,000만원~1억5,000만원이 된다. 이건 모두 자본금으로 확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원출자 가능금액은 대략 2억원정도로 예상해볼 수 있다.(1인당 최소 300~최대 700만원)

 이중 약 3,000만원을 각종 비용으로 지출한다고 할 때 1억7,000만원은 신문발행비용으로 확보할 수 있다.

 1억7,000만원이면 최소인건비를 지급한다고 볼 때 약 한달간 신문발행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 자금 만으로 신문발행에 돌입한다고 가정하면, 그 시기는 빨라도 근로복지공단의 체당금이 개인에게 지급되는 3개월후(99년 2월 이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3개월간은 공백이 불가피한 것이다.


 나. 장점


 3개월후인 2월부터 신문발행을 재개할 경우 우선 우리신문의 지면을 통해 도민주 공모를 할 수 있다. 이 경우 폐간하기 이전보다 얼마나 우리신문이 힘을 발휘할 지는 미지수이지만 나름대로 도민들에게 신뢰를 주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다. 단점


 이방안의 문제점은 이런 공백기간이 지나는 동안 일반사원들은 물론 추진주체의 맥이 풀려버릴 우려가 높다. 또 도민들의 뇌리속에서도 경남매일이 잊혀져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대자본가를 영입하기 위한 물밑교섭은 계속해볼 수 있겠지만 자본가들도 어차피 우리의 성향을 잘 알고 있을게 뻔하므로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광부이사가 추진하는 신문이 그동안 구체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경우 이를 저지할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그런 문제점이 없다고 하더라도 3개월후 바로 신문발행이 가능할지도 미지수다. 현재의 시설과 장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여광부쪽이 방해공작을 벌일 수도 있고, 제판 윤전 전산 편제사원들이 그때까지 신문제작에 즉각 투입될 태세를 유지하고 있을지도 미지수다.

 또 신문발행을 하면서 도민주 공모를 병행할 경우 신문지면도 도민언론의 명분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내용성을 채워야 하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 지도 의문이다. 자칫 그때 발행되는 신문이 도민언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도민주 공모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도민주 공모에 전력을 쏟을 사람은 편집국 기자들밖에 없는데, 취재와 도민주 공모등 두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란 정말로 어렵기 때문이다.


(2) 대자본 영입을 우선 추진하고, 추후 사원주와 도민주를 추진할때

   

 사원주와 도민주 추진계획을 일단 접어두고 법정자본금만을 우선 마련, 법인설립과 대자본 영입에 주력해볼 수도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추후 자본영입이 확정되고 신문발행이 이뤄지면 그때가서 자본주와 협의하에 증자형식으로 사원출자와 도민주 공모를 추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렇게 설정할 경우 대자본 영입이 안되면 아무것도 안된다는 것이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제호사용권리를 확실히 확보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옥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윤전기등 신문발행설비에 대한 소유권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오직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라곤 신문에 대한 노하우를 가진 사람들(인력)과 임금채권 뿐인데, 그나마 일부는 여광부쪽과 나뉘어져 있는 상황이다.

 또한 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 여광부쪽은 비교적 온건하고 순종적인 사람들인데 비해 우리는 운동권 성향의 과격한 사람들로 비춰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쪽에 수억~수십억원의 자본을 투자할 사람을 찾기란 정말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 보다 어렵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쪽에서 접촉중인 몇몇 자본가의 확실한 투자가 어렵다면 과감히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어정쩡한 가능성에 기대어 하루이틀 시간을 보내다가는 도민주는 추진조차 못해본채 모든 깃발을 내려야 하는 참담함을 맛볼 것이다.

 이 결단은 빠를수록 좋다. 적어도 13일(금요일)까지는 지금 접촉중인 자본가와 협상을 마치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만일 13일까지 확답을 받는다면 즉각 그 자본주와 협의하여 법인설립과 신문발행을 위한 구체적인 실무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물론 이에따른 모든 비용은 자본주의 부담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안된다면 바로 도민주 공모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2. 도민주 모집방안


 (1) 머리말


 도민주 신문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국 지역일간지 중 순수한 도민주로 만든 신문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일도 또한 아니다. 어느 누구도 도전해보지 못한 일일 뿐이다.

 물론 우리가 하려는 것도 100% 도민주는 아니다. 약 2억원의 사원출자를 바탕으로 최소한 10억원 이상의 도민주를 결합시키겠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헐값으로 인수가능한 윤전기와 시설기자재가 있고, 10년간 신문을 만들어온 노하우가 있으며, 이를 통해 지역사회에 쌓아온 신뢰가 있다. 

 제민일보처럼 10억원 이상의 사원출자는 어렵지만 전국최초의 개혁적 지역언론을 건설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만 모여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쨋든 우리는 2억원의 사원출자를 밑천으로 90% 도민주와 10% 사원주를 결합시킨 진정한 도민언론을 만든다는 각오로 이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그 과정에서 수억원대의 대자본가가 결합되고 안되고는 나중의 일이다. 물론 되면 좋지만 그 미련은 가지지 않는게 좋다.)

 이제부터 우리는 한국 언론의 신기원을 여는 역사적 사업에 뛰어든 ‘언론운동가’이다. 따라서 새로운 신문이 나올때까지 우리는 기자도 아니고 피고용자도 아니다. 오직 도민언론 건설작업에 동참한 ‘언론운동가’이자 「도민주신문건설추진위원회」에 소속된 ‘상근간사’ 또는 ‘활동가’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2)도민주 공모의 전제


 도민주 공모는 단순한 ‘당위’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열심히 해보자”는 결의만으로도 안된다. 

 이건 도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거대한 이벤트이며, 그들로부터 적어도 10억원이 넘는 거액의 ‘돈’을 끌어모아야 하는 대규모 비지니스다. 따라서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는 철저한 마케팅 전략이 필요하다.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을 설득시킬 뚜렷한 명분이 있어야 하고, 이 명분은 향후 새롭게 선보일 신문의 상품성에서 나온다.  

 기존의 발행중인 신문과 똑같은 신문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아무도 이 취지에 공감할 사람이 없다. 지역언론, 지역일간지의 개념을 아예 확 바꾸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신문을 만들겠다는 전략이 필요하다. 

 새 신문의 상품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마케팅 전략은 우리의 소구대상을 어떤 계층으로 할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경남신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기득권 세력을 어차피 흡수할 수 없다면 그 반대세력을 우리의 기반(소구대상)으로 삼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기존의 기득권층에 포함되지 못했거나 기득권층과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양심적 지식인(교수, 변호사, 시의원, 도의원등)과 중소자본가, 시민단체 지도자 및 회원, 개혁성향의 화이트칼라(참고로 한겨레신문의 국민주모금에 동참한 사람들을 직업별로 보면 샐러리맨이 27.7%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이 학생(12.5%)과 교사(7.7%), 대학교수(6%) 순이었다. 나머지는 기타.)와 노동자, 농민등이 해당된다.  

 따라서 새 신문의 성격은 이들이 지방신문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 시각을 청산하는데서부터 찾아야 한다. 우선 기득권 세력과 야합하지 않는 신문이라는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수구를 거부하고 개혁을 지향하며, 가진 자보다 가지지 못한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신문, 이를 위해 촌지를 안받는 신문, 광고를 강요하지 않는 신문, 도민의 혈세로 계몽지 투입을 안하는 신문, 주재기자 채용을 조건으로 보증금을 받지 않는 신문, 취재와 지사지국운영을 완전 분리한 신문 등의 경영방침을 확실히 천명해야 한다. 

 그리고 자사의 신문보도 및 편집방향에 대한 도민(주주와 독자)의 감시와 비판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며, 언론개혁을 위해 타사의 보도에 대해서도 과감히 비판하는 신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종래의 구태의연한 편집에서 벗어나 지역밀착보도를 확대하고, 지역시민운동과 지방자치에 대해 고정적인 지면을 할애하는 한편 단순한 보도기능에만 머물지 않고 도민의 권익옹호를 위한 [운동센터]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시민운동의 올바른 발전을 위한 실무교육과정 개설, 신문활용교육(NIE)과정 운영, 시내버스 개혁을 위한 시민운동본부 운영, 지방자치발전을 위한 시민-언론감시단 운영, 노동인권상담센터 공동운영등 각종 사업을 집중기획보도와 연계해 벌여나갈 수 있다.

 이밖에도 도민주 신문은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해 시민대표가 이사나 감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정관에 따라 시민지면평가위원회를 구성, 매주 신문지면을 평가하고 개선을 권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프랑스의 르몽드지와 같은 정론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적극 홍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일찍이 한겨레신문도 하지 못한 것으로 한국언론사에서 길이 남을 최초의 시도가 될 것이다.


 (3)도민주신문 건설추진위원회 발족 필요성


 앞서도 얘기했다시피 도민주 공모는 결코 호락호락하게 덤벼들 일이 아니다. 

 물론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우리 사원들의 열정과 인맥에만 의존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건 개인차가 너무 현저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사원들중 이 일에 자신의 명운을 걸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부터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 모든 프로젝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수립돼야 한다. 1층은 일단 제외하자. 그러면 2층, 그중에서도 편집국(제2사회부 포함) 70여명의 기자 가운데 우리에게 동참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약 50여명이 동참한다고 해도 이중 20여명은 관망파로 분류할 수 있다. 또 20여명은 ‘다소’ 적극적인 사람이며, 가장 열성적인 사람은 10여명 내외로 추산해보자. 

 가장 열성적인 10명 중에서도 개인의 인맥과 능력에 따라 실제로 영입해 올 수 있는 주주의 숫자와 금액은 제각기 다를 것이다. 일단 이들 열성분자가 1인당 평균 100만원짜리 10명(1,000만원)을 끌고 온다고 하더라도 1억원에 불과하다. 이것도 10만원짜리로는 1,000명을 확보해야 한다.         

 다음으로 다소 적극적인 20명이 각 500만원씩(10만원짜리 50명)을 확보한다고 해도 역시 1억원(10만원짜리 1,000명)이다.

 관망파 20명이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일단 총 5,000만원으로 잡아보자. 그러면 50명이 모두 2억5,000만원을 모금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너무 적게 잡은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이보다 2배로 계산해보자. 그래도 5억원에 불과하다. 우리가 목표로 잡는 10억원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금액이다.

 총모금액을 2억5,000으로 잡았을 때 10만원짜리 주주는 2,500명이다. 5억으로 잡으면 5,000명이다. 사원들이 확보할 수 있는 주주의 숫자는 2,500명~5,000명 선이라는 계산이다.

 그러면 이들 2,500~5,000명이 각각 자신의 친구와 주위사람들을 주주로 끌어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최소 2,500명이 각각 친구를 2명씩만 더 데려오면 7,500명(10만원*7,500=7억5,000만원), 5명씩만 데리고 오면 1만5,000명에 15억원의 거금이 모금된다.

 사원들만 주주모집에 나섰을 때 모금액은 2억5,000만원에 불과하지만, 사원들이 모집한 주주를 다시 모집책으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몇배나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인맥으로 확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다시 모집책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걸려있다고 보면 된다.

 그들을 모집책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직접 사업주체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주체이고, 그들은 객체에 불과하다면 자기돈을 내놓는 것 만으로도 부담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신문창간의 주체가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 사원들만큼 신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좋은 신문의 필요성에만 공감하여 동참하는 그들과 달리 우리는 스스로 밥줄을 확보한다는 의미까지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우리와 동일한 적극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대한 그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고, 그들에게 일정한 메리트를 줌으로써 단 한명이라도 더 많은 주주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도민주신문 경남매일 건설추진위원회(가칭)’와 같은 범도민적인 기구에 그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우리 사원들은 그들을 전면에 내세운 이 기구에서 상근실무간사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4) 재건추 조직정비 필요성-준비위원회 구성


 범도민적인 추진위 건설은 아무리 빨리 추진한다고 해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므로 우선 그 전단계로 우리 사원들을 중심으로 ‘도민주신문 경남매일 설립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이를 대내외적으로 공식화시킬 필요가 있다. 이건 여광부 집단의 기선을 미리 제압하고, 제호선점의 효과도 있다.  물론 ‘경남매일 재건추진위원회’가 있지만 아직 느슨한 형태이고, 참여하는 사람들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 기회에 조직을 재편함으로써 한겨레신문의 ‘창간발의자모임’(발기인 3.342명을 모집하기 이전단계에 조직한 초기조직으로 해직기자등 196명 참여)과 비슷한 조직형태를 갖추는게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겨레의 창간발의자모임은 발족과 함께 창간사무국을 개설하고 송건호를 대표로 하고, 정태기를 사무국장으로 선임, 본격 업무에 들어가면서 발기인 모집에 착수한 바 있다.

 우리의 경우도 설립준비위원회를 통해 사무국을 확실히 구성하고, 이 사무국 상근실무자들을 중심으로 발기인모집과 법인설립 준비, 각종 서류 및 계획서 기안등 작업을 체계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또한 윤전기를 비롯한 신문제작시설 확보방안에 대한 연구도 전담반이 편성돼야 한다.

 이 사무국은 이후 범도민 추진위가 구성될 경우 자동으로 그 추진위의 사무국으로 확대개편된다. 


 (5) 한겨레신문의 경우


 ‘도민주신문 건설추진위원회’ 건설방안을 고민하기에 앞서 한겨레신문이 국민주 모금을 할 때 어떤 경로로 추진했는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정태기(전 조선일보 기자, 출판사 사장)와 이병주(동아투위 위원장)라는 사람이 새 신문창간을 위한 기본계획과 국민주 모금방식을 몇몇 해직기자들에게 제안했다. 이에 정태기, 이병주, 김태홍등 세사람이 ‘새언론 창설 연구위원회’를 구성, 본격적인 연구작업에 들어갔고, 보름(15일)만에 ‘민중신문(가칭) 창간을 위한 시안’을 마련하고 한달동안 동지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 시안을 돌려 본 196명의 해직기자와 언론인, 사회저명인사들이 각각 50만원 이상의 창간기금(약 1억원)을 출연, ‘창간발의자대회’를 가진후 안국빌딩 14층에 창간사무국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실무작업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김수환추기경을 비롯한 각계원로 24명의 창간지지성명을 받아낸 발의자들은 새 신문 제호를 한겨레신문으로 결정하고, 한달동안 발기인 3,342명을 모집한 다음 서울 명동YMCA 강당에서 창간발기인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고 이들 발기인의 명단을 조선일보 전면광고로 발표함과 동시에 전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에 돌입한다.

 약 3개월 보름간 50억원 모금(주주 2만7,223명)에 성공한 이들은 모금과정에서 대표이사 선출과 주식회사 설립등기, 편집위원장 선임, 기자 및 사원공채를 마쳤다.

 모금 완료후 신문발행등록을 한후 신문윤리강령 채택을 거쳐 2개월 10일만에 창간호를 발행했다.

 창간 4개월만에 임시주총을 통해 200억 증자계획을 의결한후 한달후 발전기금 모금캠페인에 돌입, 8개월만에 117억원 모금(총자본금 169억원, 주주 6만1,666명)에 성공한다.

 한겨레신문의 경우 이처럼 국민주 모금을 2단계로 나누어 실시했다. 즉 창간에 필요한 최소자금 50억원을 창간준비과정에서 우선 모금하고, 창간이후 다시 발전기금 모금을 통해 신문사로서 기반을 잡았다.

 우리도 이런 방식을 활용하는게 좋을 것 같다. 즉 창간(복간)자금으로 최소 10억원 이상을 도민주로 확보하고, 2억원 이상을 사원주로 마련해 우선 창간한후 신문발행을 하면서 발전기금을 추가모금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활을 걸어야 할 것은 창간자금 10억원 모금이다. 이것만 성공해 일단 신문발행이 재개되면 추가 모금은 의외로 쉬울 수도 있다.

 여기서 주식회사 설립과 주주모집 절차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데, 우리의 경우 상법 301조에 따른 모집설립의 방법이 일단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즉 초기단계에서 기술적으로 관리가능한 범위내의 발기인(약20~30명)을 모집한 다음 이들 발기인이 정관작성과 신주인수 등의 작업을 신속하게 마무리지어 ‘설립중의 회사’를 만든 다음 증권거래법과 상법에 따라 주주모집과 회사설립절차를 마무리짓는 것이다.

 그게 제호선점에 문제가 있거나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면 우선 발기설립 형식으로 신속하게 원시정관 작성과 법인설립, 창립총회까지 마무리지은 다음 이사회와 증자절차 등을 거쳐 증자형식으로 공개주주를 모집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기술적인 어려움은 따를 것이라고 본다.   


 (6) 범도민 추진위 건설방안


 법인설립이 마무리되거나 ‘설립중인 회사’의 지위를 취득한 후 도내 각계각층 저명인사를 중심으로 발기인을 모집해야 한다. 이때 발기인은 주식회사의 발기인이 아니라 도민주신문 건설조직의 발기인이다.  이 발기인은 다다익선이다. 발기인이 될 수 있는 요건은 ‘도민주신문 건설취지에 동의하며, 이를 위한 창간기금 10만원을 출연한 사람’으로 하면 될 것 같다.(시민단체 몇몇 사람에게 의향을 물어본 결과 10만원은 큰 부담이 아니라며 흔쾌히 발기인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물론 이때 출연하게 되는 10만원은 향후 주식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발기인 모집과정에서 보여주거나 설명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도민주 신문 건설을 위한 기본(사업)계획서’가 작성돼야 하겠다. 기본계획서에는 자금조달 방안과 윤전기등 시설기자재, 사옥확보방안은 물론 새롭게 선보일 신문의 성격과 방향성이 분명히 제시돼야 한다.

 발기인에는 가급적 저명인사가 많이 들어가야 한다. 각 대학총장이나 종교지도자, 각종 사회단체 대표, 변호사와 의사, 교수등 전문가 집단 등의 이름이 많을수록 도민들에게 신뢰감을 준다. 이순항 전 대표이사도 모실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정치인도 관계없다고 생각된다. 특히 도의원이나 시의원도 최대한 끌어들여야 한다. 물론 우리도 발기인에 포함되며 각 시민사회단체 실무자나 회원들까지 모두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들을 발기인으로 모시기 위한 양식으로 ‘도민주신문 건설추진위 발기인 참여동의서’를 미리 깔끔하게 만들어야 겠다. 이 역시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기위해 복사용지로 엉성하게 만들게 아니라 돈이 좀 들더라도 칼라인쇄를 하여 작은 팜플렛 형식으로 만들면 좋겠다. 애들 장난으로 비치면 안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간단한 발기선언문이 들어가는게 좋겠다.

 이 동의서에 서명하고, 10만원을 내면 추진위 발기인으로 정식등록한다. 약 보름동안 바짝 뛰어 발기인 모집이 어느정도 마무리되면 약 1주일간 준비작업을 거쳐 약간 거창하게 발기인 대회를 개최한다. 

 이 발기인 대회에서 정식으로 ‘도민주신문 경남매일 건설추진위원회(가칭)’를 발족하게 된다. 여기에서 기구의 정식명칭과 대표, 임원, 집행위원, 사무국등이 구성되며, 정식으로 창립선언문을 채택하며, 규약과 사업내용 등을 확정한다. 물론 이런 사항은 미리 내정과정을 거쳐 준비가 완료돼 있어야 한다.

 이때 주식회사 설립이 완료돼 있다면 정관을 여기서 공개하고 추인을 받는 한편 증자형식의 주식모집 절차에 대한 설명과 적극적인 동참을 당부하는 자리가 돼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설립된 법인의 이사회를 거쳐 증자를 결의하고 증권거래법에 따른 유가증권 모집절차가 법적으로 완료돼 있어야 한다. 

 만일 주식회사 설립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상법상 ‘설립중인 회사’라면 이 자리에서 설립절차와 경과를 설명하고 정관초안을 확정하는 한편 주주모집 방법을 설명하고 발기인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협조를 당부하는 자리가 돼야 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설립중인 회사로서의 상법상 지위를 획득한 후 증권거래법에 따라 유가증권을 발행할 수 있는 법적절차를 거의 마친 상태여야 한다.    

 발기인대회와 추진위원회 발족식을 마치면 바로 공개적인 도민주 공모에 들어갈 것이므로 광고전단과 일간신문 광고도안을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한다. 주식청약서 양식도 마찬가지다.(주식청약서와 광고전단을 한가지로 통일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신문광고는 한겨레신문과 마창, 진주지역에서 발행되는 일간 교차로등이 좋을 것 같다. 이 작업은 홍보기획팀을 구성, 신문광고와 각종 언론보도, 광고전단 작성, 각종 시민단체 소식지 지면확보등 사업을 벌여나갈 수 있도록 하는게 좋겠다.

 또 도민주 약정금을 수납하기 위한 통장구좌를 미리 개설하고, 경리팀을 두어 매일 매일 수금상황판을 공개하고 자금을 수납관리토록 한다. 이와함께 추진위 조직을 관리하기 위한 조직관리팀도 별도로 둘 필요가 있다. 조직관리팀은 수시로 의장단회의와 자문위원회를 소집하고, 그들을 독려함으로써 도민주 모금이 지속적인 폭발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소식지 발간팀을 두어 적어도 격주 1회 정도는 신문대판 크기의 소식지를 발행, 배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같은 실무팀은 주로 우리 사원들로 구성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사람중 자원자가 있다면 가담시켜도 좋을 듯 하다.

 모금과정에서 홍보기획팀은 도민주 신문 건설을 위한 토론회나 세미나 등을 개최해볼 필요도 있으며, 그 내용은 소식지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하도록 한다. 또 

도민주 신문 건설을 위한 일일호프나 일일찻집, 전시회, 문화한마당등도 각 시민단체의 지원을 받아 개최해볼 수 있다. 전시회는 일여성예술이나 민예총 진보적 문화단체 회원들의 협조를 받으면 될 것이다.


 (7) 범도민 추진위 구성 일정


 일단 주식회사 설립을 위한 방법론을 먼저 선택한 다음, 행정적인 절차를 빨리 추진해야 한다. 그게 법인 설립 완료후 증자형식의 도민주 모집이 되든, 설립중인 회사로서 모집설립 방식이 되든 그 전단계를 마친 단계에서 발기인 대회가 치러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우리 사원들을 중심으로 먼저 ‘도민주신문 경남매일 설립준비위원회’를 먼저 발족한 다음, 이 조직의 발족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고 이를 중심으로 우리 사원들이 뛰어나가 발기인 모집을 하러 다니는 동안 모든 법적절차가 이뤄져야 한다. 이때 법적절차는 주식모집을 위한 증권거래위원회 신고등 절차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발기인 대회 이전의 법적 절차가 언제까지 완료될 수 있는 지를 먼저 설정해야 하고, 그게 설정되면 약 보름간 일정을 잡아 발기인 모집을 하러 우리들이 모두 뛰어다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기인대회 날짜를 잡고, 장소섭외와 발기선언문 작성, 임원진 내정, 사무국 조직구성 등을 미리 해두어야 한다. 물론 주식청약서 인쇄도 마쳐두어야 할 것이다.

 발기인 대회를 마치고, 본격적인 주식청약을 받는 시기는 적어도 한달후(12월 15일)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8) 범도민 추진위 조직구성 


 추진위 조직은 공동대표를 약 5~10명 정도로 선임하고, 이들을 포함한 20여명으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한다. 공동대표와 운영위원은 가장 적극적으로 도민주신문 건설에 동참하는 사람들로서 어느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가장 많은 주주를 끌어모을 수 있는 사람으로 구성한다. 여기에는 우리 사원중에서도 부장급 1~2명과 전임노조위원장 2명(최춘환, 김현식)중 1명 정도가 공동대표와 운영위원으로 포함돼야 할 것이다. 이때 법인설립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의 ‘설립중인 회사’라면 공동대표와 운영위원을 주식회사 발기인으로 하면 좋을 것이다. 즉 수많은 발기인중 이들을 대표로 하여 정관에 서명날인 하게 하고 이력서를 첨부하여 설립등기를 마치는 것이다.  

 공동대표단과 운영위원회 아래에는 집행위원회를 두고 구주모 재건추위원장이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총괄적인 업무를 집행한다. 그리고 편집국 기자 2명, 제작지원부서 차장급 1명등 3명을 상임집행위원으로 두어 상집위원장의 직속심부름꾼으로 활용한다. 

 실질적인 업무를 지휘할 사무국장에는 최춘환 또는 김현식 전임노조위원장이 좋을 듯하다. 

 사무국은 팀별 조직으로 구성되는데, 이 사무국이 실질적인 상근실무조직이 된다. 물론 사무국은 대부분 우리 사원들로 구성될 것이다. 그러나 창간사무국의 고문변호인단은 사무국 방계조직으로 두는게 좋을 것 같다. 사무국 팀별 조직을 우선 생각나는대로 거론해보면 ◇도민주 접수팀 ◇홍보기획팀(언론플레이, 신문광고, 각종 팜플릿 제작, 토론회 전시회등 이벤트 기획 실행) ◇소식지제작팀 ◇행정팀(법인설립 및 정기간행물 등록) ◇금융팀(리스계약, 은행거래 개설등) ◇시설확보팀(사옥, 윤전기, 조판 제판기등 확보) ◇조직관리팀(새신문사의 조직 구성 및 내부조직관리, 연락) ◇신문개혁팀(새 신문의 지면기획 및 기자윤리강령 마련, 개혁적인 신문을 만들기 위한 각종 제도적장치마련)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조직을 표로 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다음 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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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있는 학자가 대중적 글쓰기도 잘한다면?

역사기록|2009. 2. 2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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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금) 서울대 인문학관에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동계워크샵과 정기총회가 열렸다. 제노사이드연구회란 그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있었던 집단학살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공주대 지수걸 교수와 내가 각각 충북 영동지역과 경남 함양지역의 민간인 집단희생자에 대한 조사 결과와 조사 과정의 소감을 발표했다.


이어진 정기총회에선 지난 3년간 회장을 맡아오신 동아대 홍순권 교수에서 서울대 정근식 교수로 회장이 바뀌었다. 지난해에 이어 내가 감사를 맡게 됐다. 나는 지난해에도 감사였기 때문에 지난해 사업과 예결산에 대한 감사보고를 했는데, 기록차원에서 남겨두자면 다음과 같다.

감사보고서

-제한된 예산 한도 내에서 알뜰하게 살림을 잘 한 것으로 평가되며, 부적절하게 지출된 내역은 발견할 수 없었음.
-오히려 지출내역이 너무 알뜰한 나머지 집행부에서 사업을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음.

-또한 <제노사이드연구> 3호의 경우, 발송비가 2호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것으로 보아 어렵게 발행을 해놓고도 제대로 활용과 배포를 못한 게 아니냐는 걱정이 됨.

-특히 회원관리가 체계적이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회비를 낸 회원은 얼마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남.

-따라서 연구회보 발행과 배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고, 회보 발송과 연계하여 회원들로 하여금 회비 납부를 권유해야 할 것으로 생각됨. 회비 납부는 단순히 재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회원으로서 소속감과 권리의식을 높이는 동시에 활동에 참여하는 동기유발의 차원에서 연구회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하는 필수요소임.

-이를 위해서는 연구회보를 반년간지 또는 계간지로 빠지지 않고 정기발행하겠다는 의지와 적극성이 요구되며, 월 1회 정도의 이메일 뉴스레터를 통해 제노사이드 연구동향을 회원들에게 알려주면 좋겠음.

-또한 이메일 뉴스레터에서는 매달 회비납부 내역과 납부한 회원 명단을 공유하는 것이 좋을것으로 생각됨.

-당장 오늘 총회 자리에서 회비의 액수와 계좌를 공지할 필요도 있음.

정근식 교수

지수걸 교수

홍순권 교수를 바로 찍은 사진이 없었다. 왼쪽의 웃고 있는 분이 홍순권 교수다.


워크샵과 총회를 마친 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대중적 글쓰기'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홍순권, 정근식, 지수걸 교수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처럼 대중적 글쓰기를 하셔서 책을 내 많은 대중들이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교수님들은 "논문 잘 쓰는 사람 따로 있고, 대중서 잘 쓰는 사람 따로 있다"며 "우리는 그쪽에 역량이 안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쉽다. 이들 홍, 정, 지 교수는 역사, 특히 한국현대사 분야에서 특출하신 분들이다. 대중들이 접하기 어려운 논문이나 학술서뿐 아니라 대중적인 역사책들을 내놓으면 왜곡되고 은폐된 근현대사를 바로잡는데 많은 도움이 될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다.

전갑생 회원이 찍어준 사진이다.

중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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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자 되라고 강요하는 사회

역사기록|2008. 11. 3.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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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30·40대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가장 많이 들어온 삶의 지침은 뭘까? 아마도 '모난 돌이 정 맞는다''너무 앞에 나서지 마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우리 어머니는 내가 군에 입대할 때 이런 말씀도 일러 주셨다. "군대에서 줄을 설 땐 무조건 사람이 많은 쪽에 서야 한다더라. 그리고 너무 앞에도 서지 말고, 뒤에도 서지 말고 항상 중간에 서야 한단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친구를 협박할 땐 이런 말을 썼다.

"이 자식 사상이 꼬롬하네? 너 그러다가 정말 '골'로 간다."

요즘도 기자들 사이에선 큰 기사를 낙종했을 때 "물먹었다"는 표현을 쓴다.

'골로간다'와 '물먹었다'

'골로 간다''물먹는다'는 표현이 살육의 현대사에서 비롯된 말임을 알게 된 것은 민간인학살사건을 취재하면서부터였다. 해방 이후 6·25를 전후로 하여 사상이 '꼬롬(?)'한 사람은 모두 골짜기로 끌려가 총살당하거나 바다에 수장된 데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만주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희한하게도 나는 그때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박정희와 김대중이 유력한 후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 담벽에 붙은 선거포스터를 보던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빨갱이 나라가 된다카데?"

"그라모 큰일이네? 우린 이제 죽었다."

그 후 선거일까지 계속 악몽을 꾸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 괴뢰군을 이끌고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마루 밑에 기어 들어가 숨었다.

마침내 선거일이 됐다. 정말 불안했다. 투표를 하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붙들고 물었다.

"아부지. 김대중이가 대통령이 되면 우짭니까? 그 사람 공산당이라 카던데."

"걱정마라. 투표장에서 보니까 대중이 찍는 사람은 전부 찾아내서 다시 찍으라고 하더라. 그 사람은 안될끼다."

과연 그는 떨어졌다. 나는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후 중학생일 때였던가? 겨울밤 가족끼리 안방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얘기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다. 아마 그에 대한 나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때 가족 중 누군가가 갑자기 음성을 낮추며 이렇게 말했다.

"쉿! 조용히 해. 누가 들을라." 그러자 옆에서 모시를 삼고 있던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도 있지."

그때도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벌써 누군가가 들은 것은 아니었을까? 또 악몽에 시달렸다. 경찰이 우릴 잡으러 오는 꿈이었고, 그때마다 마루 밑에 숨어 공포를 달랬다.

5.16쿠데타 거사를 치른 후 박종규(왼쪽), 차지철(오른쪽)과 함께 선 박정희.


초·중학생의 어린 마음에까지 공포를 심어주던 박정희도, '골로 간다''물먹는다'는 말을 만들어낸 이승만도 지금은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됐다. 그러나 그들의 계승자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우리의 의식을 조종하려 하고 있다.

우익은 없다, 기회주의자만 있을뿐!

광복 63년을 맞은 지금,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일제시대 친일 안한 사람이 어디 있나." "삶과 예술작품은 따로 평가해야지."

수십만명의 민간인을 재판도 없이 살육한 국가범죄에 대해서도 그들은 이렇게 강변한다.

"그때 그렇게라도 안 했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빨갱이 세상이 됐을 걸." "그러게 누가 앞에 나서래? 모난 돌이 정 맞은 거지 뭐."

아하! 우리 부모들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셨던 '모난 돌…'은 결국 그 말이었구나. 강자 앞에 대들다간 '골'로 가게 되니 대세에 순응하며 적당히 목숨을 부지하라는 말씀이었구나.

얼마나 공포의 세월을 살아오셨으면 자식에게 '기회주의자가 되라'고 가르치셨을까.

그렇다면 지금 이승만과 박정희의 계승자들은 과연 우익일까, 그냥 머리 좋은 기회주의자에 불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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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돌이 2008.11.03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인데.. 아직도 이놈의 멍청한 국민들은 딴나라당을 뽑아주니... 멍청한 종자들... 500년간 상놈의 자식들이었는데..역시.. 100년이 지나도 종놈의 근성은 없어지지 않는 구나..

    • Favicon of http://ㅇㅇㅇ.ㅇㅇ BlogIcon 하옹 2008.11.04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도 어렸을때 조센징 이런말 싫었는데

      괜히 쪽발이들이 그런말 하는게 아니더라구

      이 민족의 발전성은 없는것 같음

      임란이나 을사조약만 봐도

      뒤통수를 여러번 당했어도

      일본 좋다고 헤헤덕 거리는것 보면

      이 개한민국사회에 대한 증오를 느낌

  2. Favicon of http://ramazzoti@hanmail.net BlogIcon RAMAZZOTI 2008.11.04 0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구상에서 생명력이 가장 강하다는 바퀴벌레가 멸종했음 했지. 딴나라당과 알바들, 친일 분자들은 멸종 안될걸요~

  3. 심하다 2008.11.04 0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만있으면 딴나라당과 알바, 친일이니....

    다른 사람들한테 줏어들은 이야기 되뇌이지 말고 생각좀 하고 사시길....

    똑같은 논리로 당신에게 공산당과 김정일알바들, 빨갱이라고 단정짓는다면 이게 정상으로 보이나요?

    • 2008.11.04 0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치에 대한 제반적 지식을 갖췄다면 저런 말을 안되뇌이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똑같은 논리'라는 얘기는 상당한 모욕인데요.

      '딴나라당과 알바, 친일'이야 근거를 얼마든지 댈 수 있겠습니다만, 공산당과 김정일알바들, 빨갱이와 '당신'과는 관련을 찾기가 어렵네요.

      말씀하신 의도를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존중은 상대성, 다양성을 기초로 해서 비롯된 것이지, 옳고 그름, 시비의 영역에 있어서 그름을 존중하라는 건 터무니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Favicon of http://ㅇㅇㅇ.ㅇㅇ BlogIcon 개한민국 2008.11.04 0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런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박정희 추종하지..

      그냥 패쓰

  4. Favicon of http://ㅇㅇㅇ.ㅇㅇ BlogIcon 하옹 2008.11.04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정한 기회주의자는 꺼삐단리 박정희 장군이지..

    공산주의자, 친미주의자, 친일파 안해 본게 없다

    명예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5. 역시 2008.11.04 0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라도가 최고죠^^

    우리 전라도의 아들 정동영님께서 대통령이 되셨어야

    우리 전라도가 사는데

    정말 이 울분은

    아무리 데모 나가도 풀리지가 않네여^^

    • 헉 무슨 정동영 2008.11.04 0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슨 정동영..미쳐..차리리 문국현이가 났고..권영길이가 났지..ㅎㅎ

    • 이거바라.. 지능형 안티네 2008.11.04 0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먼 정동영?

      먼 전라도?

      먼 데모?

      참.. 웃기시네. 지역감정 조장하지 마쇼 .

      딱보니 전라도인척 이상한말 하시는데 참나..

    • 가는구나 2008.11.04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타도어 하지마소. 전라도 인척하면서 은근히 지역감정조장하는 것은 정말 개념이 없이 하는 것이라요.

  6. 꺼삐딴 리 2008.11.04 0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는 우익도 없고 보수도 없어요..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해 뛰는 꺼삐딴 리만 있을 뿐...ㅎㅎ
    그리고 역대 최고의 꺼삐딴 리는 물론 박정희...

    그래서 박정희 잘 추종하잖아요..존경하는 대통령도 박정희..ㅎㅎ

    공부햇다는 대학생이나 농촌에서 농사 짓는 사람이나.
    산에서 삼캐는 사람이나, 사람 잡는 검사나..
    머리 속에 머가 있을 까 ??

    공부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머리 속에 생각하는 부분은 있을 까 ??

  7. 친일청산 2008.11.04 0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에는 대표적인 기회주의자가 있다.
    바로 친일파들이다.
    일제시대에 친일파들이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다시 득세했다.
    그들의 기득권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어 왔으며 사회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다.
    윗물이 이리 썩어 빠졌는데 무슨 ...... 쯔쯔
    할 말이 없다.

  8. 매국노청산안한게정말 2008.11.04 09: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들이 나라의 권세를 휘어잡고 좌지우지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거다 --

    과연 우리가 또 다른나라의 침략을 받는다면 목숨걸고 나라를 지킬 젊은이들이 나올수있을까?

    우리나라를위해 목숨바쳐 희생한분들은 3대가 가난하고 일본 뒤나 핥던 매국노들은 3대가 부자니 정말 분통터진다..

  9. 한국이.. 2008.11.04 0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대로된 선진국이 될려면 국민소득이 중요한게 아니라..
    국민의 마음가짐이 중요한데...한국은 아직은 한참 부족한듯...
    다음세대나 되야 길이보일까.,..

  10. 갱상 2008.11.04 1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가 남이가...

  11. 오호라 2008.11.04 1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는 모난 돌보다도 그 '정'을 없애버려야하지요...올바로 가려면.

  12. 장영철 2009.04.07 2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는만큼 보인다 했는데 국민이 무지하면 순전히 피해는 못가진자들에게 거의 돌아간다.특히 사회 시스템이 뿌리 내리지 못한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난데도 아직도 인물보단 혈연,지연,학연에 의해 지도자를 뽑고 있으니 불행의 씨앗은 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안타깝고,서글픈 현실..............

[발굴]청년방위대원도 6.25때 학살당했다

학살기록|2008. 7. 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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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국전쟁 때 노근리사건이나 보도연맹 사건과 같은 민간인학살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와 여러 사회단체의 노력으로 상당수 실체가 드러나 있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의 지도감독을 받았던 준군사조직이었던 청년방위대원들이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처형된 사례는 밝혀진 게 없었다. 어쩌면 학살의 가해자 쪽으로 분류될 수도 있었던 청년방위대원들이 피학살됐던 사연은 뭘까.

이 사례를 처음으로 발굴한 충북역사문화연대 김순애 교육부장의 취재기를 공개한다. 이 글을 계기로 기성언론들의 보충취재와 보도도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내가 녹음기와 캠코더를 들고 싸돌아다니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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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거의 매일 충북 영동에 간다. 이렇게 싸돌아다니는 게 나의 직업이다.

날이 더워져서 에어컨 안 나오는 마티즈 타고 고속도로를 탈 때면 조금 괴롭다. 그러나 영동만 들어서면, 울창한 산과 강과 바람 덕에 더위를 모른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놈이 촌스럽다며, 안 들겠다고 팽개쳐, 내 차지가 된 멜빵가방엔 디카와 녹음기, 수첩과 자료로 비좁다. 그리고 어깨엔 캠코더와 삼발이를 맨다.

왜 이렇게 준비물이 많냐구? 나의 출장은 옛이야기를 묻고 찍고 기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채록하는 이야기는 먼 일제 때부터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다.

마을에서 어르신을 만나면, 꾸뻑 인사한다. 그리고 “할아버지, 전쟁 때 여기에서 보도연맹원으로 죽은 사람이 있나요?”하면, “그건 왜 물어?”하고 의심스레 쳐다본다. “예,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분들 명예회복 시켜 드리려구요”하면, 그제서야 “그때 하도대리에서 많이 죽었지. 그 상황을 잘 알려면 남○○ 찾아가 봐”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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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똥을 맘껐 따먹게 해준 할머니(남우현의 처)

한 여름에도 물이 차갑다는 물한리계곡을 좌측으로 끼고 하도대리 본동 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에서 83년간을 살았다는 남우현 할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 찾아간 날은 할아버지가 들에 나가셨다. 이틀 후 다시 찾아가니, 이번엔 황간향교에 가셨단다.

“아이구 뵙기 힘드네요”하니, 할머니가 “보리똥하고 앵두 좀 따먹고 가”하신다. ‘에이 보리똥으로 배나 채우자’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많이’ 따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오셨다.

최초발굴 : 영동군 청년방위대원이 집단 처형된 사연

“어쩐 일이래요?”, “예. 6.25때 마을역사를 알려구요”하니, 전쟁 나기 전 '청년방위대'에 근무했던 일부터 입이 열렸다. “상촌국민학교에서 약 40~50명이 한 달간 훈련을 받았는데, 하루는 영동읍에 신무기교육을 받으러 간다구 20명을 차출하더라구.”

그런데 놀라운 이야기가 나왔다. 경산으로 간 20명 청년방위대원 중 10여명 국민보도연맹원이 경산코발트광산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 9명이 하도대리 청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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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상촌면 청년방위대 사무실 터에서(증언자 남우현과 충북역사문화연대 운영위원장 박만순)

이제까지 영동지역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20일 영동읍 어서실, 석쟁이재와 상촌면 상도대리와 고자리에서 300명 가량이 처형되었다고 알려져 왔었다. 그런데 어떻게 상촌면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산코발트 광산에까지 끌려가서 집단처형 되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청년방위대는 대한청년단이라는 단체에서 시작됐지만, 전쟁 때는 국방부의 지도감독을 받는 준군사조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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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증언하는 남우현 할아버지.

이 궁금증은 남우현 할아버지의 3시간에 걸친 증언과 관련 비문에 대한 현장 안내를 통해 해소될 수 있었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이 함락되고, 영동에는 다음날인 7월 21일 소개령이 내려졌어. 아내와 노부모를 남겨 논 채 마을 청년 11명이 피난증을 가지고 피난을 갔어. (영동군)매곡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에는 경북 김천가서 잤지.

그러다가 경북 경산을 가게 됐는데 아는 사람의 연고로, 코발트광산의 여관에 묵게 됐어. 하루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지에무씨(GMC)에 사람을 가득 싣고, 어디론가 달려. 트럭 네 귀퉁이에는 한사람씩 앉아있고 말여. 한시간을 앉아 있는 동안 40대가 지나가. 그런데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그러는 겨. 나중에는 노인도 실려 있더라고. 근데 그때는 트럭에 실린 사람이 누구고 어디로 가는 지 몰랐지.”

이들이 보도연맹원들이고, 영동군 청년방위대원 중 보도연맹원들이 끼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경산국민학교에 영동군 청년방위대원들이 있다는 겨. 그래서 마을 친구들도 볼 겸 갔지. 마침 정문초소에 친구가 있더라고. 그런데 경산국민학교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어.”

그러다 남우현씨는 방위군 장교 박홍기를 만났다. 박홍기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경산초등학교 운동장에 청년방위대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장부책을 놓고 하는 말이 ‘보도도연맹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눈감고 손들어’하데.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서 나가니까 교실로 데리고 갔어. 이들을 코발트광산으로 끌고 가 전부 처형했지. 내가 미리 내막을 알았더라면 동네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해서 상촌면 하도대리에서만 9명의 꽃다운 청년들이 코발트광산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학살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남승길(본동), 남칠현(본동), 남호현(본동), 이병덕(본동), 남응현(본동), 송정호(신기), 남승만(신기), 김창은(신기), 남종(소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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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랑비 측면의 국가유공자 명단.

그런데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 하도대리 마을자랑비에 국가유공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마을의 유래와 열녀를 소개한 마을자랑비 옆면에는 한국전쟁기 국가유공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비석에 9명의 코발트광산 희생자 명단이 섞여서 실려 있는 것이다.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순애(충북역사문화연대 교육부장)

용화면 청년방위대 인솔자 강태석 소대장의 고백(녹취록 요약)

증언일시 : 2008년 2월 13일
출생년도 : 1929년.
출 생 지 :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 내룡.

1943년 용화공립심상소학교 졸업했다. 17살 때 해방이 되었다. 용화광산에 있던 라디오를 듣고 해방을 알았다. 해방 후 용화에는 대동청년단이 있었다. 나도 대동청년단에 들었다. 단장이름이 정용석이던가 그렇다. 그분은 6.25때 장교로 전사했다. 용화국민학교에 모여서 연설을 들었다. 그때 부락에서 야경을 하고 초소막을 지어 놓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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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석 당시 청년방위대 용화면 소대장.

영동면화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대한청년단 훈련을 받았다. 100명이 넘었다. 면에서 좀 똑똑한 사람을 불러서 훈련을 했다. 그때 김영철이 교관이었다.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중대장은 이경승이었다. 소대장은 김긍식(어디사람인지 모름), 흘계사람 최양열, 월전리의 이조승, 용화리의 강태석이었다. 소대장이 리별로 다 있어야 하는데, 여건상 자계리와 용강은 정식임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소대장을 했다.

나는 수원 방위사관학교 5기생이다. 그때 동기생은 약 200명 쯤 된다. 양강면의 장시문 장구섭이 동기생이다.

권준대령이 지은 작전요무령을 배우고, 여순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장교들만 보았다. 그 영화는 사병들은 못 보았다. 1달 훈련을 받고, 50.5.31 임관했다. 임관 후 조동소대로 배치되었다. 대원이 조동과 안정리를 합쳐서 50~60명, 자계리 구백이 횡지 여의리 합쳐서 100여명, 용강리가 30명, 월전 흘계리가 50명, 용화 내룡 창골 합쳐서 50명 정도였다. 용화면 전체 청년방위대 대원이 대략 300여명이다.

6.25가 나자 전(全)대원을 용화국민학교에 집합을 시켜서, 이경승 중대장이 65명 지원을 받았다. 영동가서 1주 훈련하고, 완전무장하고, 고향으로 돌아 와 공비토벌하라고 했다. “강소위는 미혼이고, 혼자니까 거리낌이 없다. 적임자다. 훈련받고 이런 일을 하라”고 했다. 22살 때인데 무서운 줄을 모르고 하겠다고 했다.

7월 15일쯤에 영동에 나왔다. 도보로 영동에 나와 보니까 현역연대였다. 영동에서 1주일 정도 있었다. 5신병교육대 몇 중대에 편성이 되었다. 대장이 이대영 중령이었다. 무주사람과 영동사람 혼성팀이었다. 2-3일 수류탄 투척 각계전투 훈련을 하다보니까, 심천방향에서 불이 환하게 올라갔다.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대포가 올라가는 거라고 했다.

5~6살 더 먹은 선배들이 저녁마다 어디 갔다 오더니 추레했다. 고문을 받았는데, 보련(국민보도연맹)에 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잡아다가 캐묻는다고 했다. 보도연맹에 들은 사람들 나오라고 할 때, 벌써 신병교육연대에서는 벌써 그 명단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신원조회 해가지고 고향으로 쫓아 버릴 려나 보다’하고 그 사람들이 그때 이름 써서 냈다. 집으로 보낼 줄 알고 “같이 가자, 가자”하며 들었다. 그 사람들이 5신병교육대 연대본부에 가서 고문을 받았다. 5신병교육대 연대본부는 영동농협 맞은편에  일본사람이 살던 2층 목조집이었다.

숙소는 중국사람 천성태씨 집이었다. 거기 비어 있는 집에 가서 숙식을 했다. 방이 교실만큼 컸다.
 며칠 후 밤에 10시 넘어서 정거장으로 인솔하라고 했다. 인솔 중에 오포대 넘어 영미사진관이라고 있었다. 거기에 미군들이 와 있었다. 미군인데 흑인이 한국말을 했다. 어머니가 한국사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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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코발트 광산 유해발굴 장면.(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짐싣는 차를 타고 2~3시간을 지나 한 12시가 넘어서 기차가 떠났다.  심천에서 대포가 올라가는 걸 보고 2-3일 쯤 후에 기차를 탔는데, 7월 20일쯤일 것 같다.  영동역에서 기차에 탄 사람들은 용화면사람 65명과 무주사람이었다. 용화・무주 중대장은 진경준 중대장이었다. 그리고 영동군내 다른 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용화면 사람만 기억하지 다른 면 사람들은 모른다. 날이 샐 때 쯤 보니까 대구 시내를 지나는 중이었다.

한참 있다가 경산에서 내렸다. 경산중앙국민학교로 데리고 갔다. 낮에는 교육 훈련을 했다. 그러다 2~3일 후에 보련에 가입한 사람들을 전부 빼내서, 6중대라고 새로 중대를 편성을 해서 강당에 집어넣었다. 머리를 빡빡 깎아서 집어넣었다. 강당에 넣은 지 5~6일, 근 일주일 있었다. 강당에는 한 100여명이 있었다. 용화면 사람은 22명이고 더 있을 수도 있다. 설천면 사람도 두 명이 아는 사람이 있었다.


영동에 있을 때 밤에 고문당하고 추레하게 있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보도연맹으로 불려간 용화면 사람들 22명 이름을 손으로 꼽는다.

안정리 이갑문, 조동리 박태하・정규태・박규성・이남희(이명 이재춘)・양상수・이종관(동창)・강원형(동창)・김삼조(나이 많다), 창골의 장재호(선배)・강영희・이갑봉, 용화의 양도영(동창)・최창덕, 하용강의 김용한, 구백이의 김해봉, 횡지의 김종진, 여의리의 이시영, 흘계의 강낙희, 월전의 임원승・김삼봉・박달준씨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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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된 유해.


그리고 무주군 설천면 사람도 있었다. 기곡리의 퇴일동네에 살던 동창생 박래한과 김옥래가 확실히 6중대에 들어갔다. 양강사람 장시문이 예비군 중대장을 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집에서 죽었다.

경산국민학교에서 6중대를 따로 분류할 때 불길한 마음이 들어, 청방교육대 정보과로 가서 “왜 따로 놓느냐”고 물으니까 육군중령이 “걱정말라”고 했다. 근데 그날로 다 데리고 갔다. 방위장교한테 물으니 “헌병들이 와서, 엮어서, 싣고 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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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_top_blogtop=go2myblog BlogIcon 실비단안개 2008.07.08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중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2. 육방(육개월 방위) 2008.07.08 2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배님들이 저런 고초를 겪었다니 가슴이 아프네요.
    그런데 왜 현역에 입대하기 위한 방위대원들이 광산에서 죽었나요?
    방위는 사람이 아닌가요?

  3. 진지 2008.07.09 0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촌면이 우리 고향인데~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전쟁이 나서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입대 했는데,
    그중에 보도연맹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니. 이해가 안 간다.
    글을 읽어 보니 하도대리 사람 9명이 죽었다는데, 정말 사실인가?
    믿을 수가 없다.
    누군가 답좀 해봐요~

  4. 짱돌 2008.07.09 0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첨에 사진이 이상해서 여기 글을 읽었다.
    근데 이게 모냐?
    강가에 뒹구는 자갈도 아니고 다 사람들 뼈라고..
    참 ..심하다!!

  5. Favicon of https://armishel.tistory.com BlogIcon 아르미셸 2008.07.09 05: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말을 이해하려면 보도연맹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해방이 될 당시 남한에는 공산주의에 접했었거나 그와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는 이들이 있었고 사상관련 문제로 체포된 이들에게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준다는 의도로 보도연맹이라는 것이 조직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잘 설명해줄 분들이 많을테니 약간 더 검색해보시고요,

    사실, 이 보도 연맹원 중에는 공산주의자였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냥 동네별로 할당되었다던지 하는 이유로 별 상관없는 이들까지 관련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에 대한 시선은 급냉각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북한과 싸우는 상황에서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의혹의 화살이 이들에게 돌려진 것이죠. 또, 보도연맹원의 일부가 남침해온 북한군의 편을 들어서 그 동안 입었던 불이익을 보복했다는 소문들이 퍼지자 이들에 대한 학살이 전국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부족해서 추측등에 의존하는 바가 많고 어느 정도 윗선까지 보도연맹 학살에 연관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상당히 고위층까지 연관되어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한 것이고요, 문제는 앞에도 설명했듯이 보도연맹원 중에는 실제로는 공산주의랑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까지 있었지만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국군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점점 학살은 무분별하게 확대되었습니다. 그러한 학살과정의 일부에 해당되는 사건이라고 보이네요.

    저도 전공이 아니라서 많이 아는 것은 없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숨겨진 과거들이 뜻있는 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데 일이 잘 되어서 다시는 이렇게 불행한 과거가 재현되지 않도록 했으면 합니다.

  6. 흑비 2008.10.10 1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전쟁은 북한에게만 책임이 잇는것이 아니다 남한의 무책임한학살을 방치하고 실행한 정부와 국군의행동이 역겹다 희생자의 가족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제라도 이루어져야한다 자기들 가족아라고 하면 그럴수 잇겟나 살인마들아....

  7. 장영철 2009.04.07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억울하게 죽어간 순박한 우리의 조상들.힘을 길러야 함부로 못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