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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2005년 봄이었다. 60대 후반의 한 어른이 나를 찾아왔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했다는 안인영(당시 69세) 씨였는데,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찾고 싶다"고 했다. 내가 민간인학살 등 지역현대사의 은폐된 진실을 계속 취재해 보도하는 걸 보고 "이 기자에게 부탁하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창원 상남면 퇴촌리 출신 안용봉(1912~1950)이란 분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경찰에 끌려가 재판 절차도 없이 창원 삼정자동의 한 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


아들 안인영 씨.

아버지 안용봉 선생의 젊은 시절.


해방된 지 2년 되던 그 해 창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2주년 기념식장에서 연사로 나온 아버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옷을 입고 계셨지요. 당시 35세셨던 아버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수많은 청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직도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은 맞았으되 이는 완전한 해방이 아닌 껍데기 해방일 뿐입니다.' 아버지 이 한 마디에 수많은 청중들이 떠나갈 듯 박수를 쳤지요.”


그의 아버지는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고, 그 때문에 정권의 감시를 받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끌려가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개의 학살 유족들이 그랬듯 '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이 두려워 이런 사실을 평생 자식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다 정년퇴임을 했고 "내가 죽기 전에 아버지의 명예를 꼭 회복시켜 드리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다행히 안용봉 선생의 기록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와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를 통해 일제의 재판 기록과 복역 기록을 찾아냈다.


2005년 부산경남사학회 학술대회.


마침 그해 6월 부산경남사학회가 주최한 ‘한국전쟁 55주년 기획발표-한국전쟁시기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문제’ 학술발표대회가 열렸다. 그날 나도 ‘보도연맹원 학살과 지역사회의 지배구조-경남 마산지역의 사례와 인물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는데, 아들 안인영 씨는 청중석에 끝까지 앉아 발표를 지켜봤다. 70의 나이에 다시 역사 공부를 시작한 셈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재판기록과 학살당했다는 증언 등을 첨부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지정을 신청했고, 이듬해인 2006년 8월 광복 61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아 독립유공자가 됐다. 아버지의 명예가 공식 회복되는 날 아들 안인영 씨는 기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이 이렇게 나쁜 인간인줄 정말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역사를 찾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새롭게 쓰이고, 반드시 다시 정립돼야 한다는 사실을."


그 후 창원시 동읍 국도를 지나다 낯익은 이름이 적힌 표지판을 발견했다. '애국지사 안용봉 선생 묘지'였다.







2006년 안용봉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확정되었을 당시 내가 썼던 칼럼을 첨부해놓는다.


아들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한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자랑스러운 항일 경력을 철저히 비밀로 간직해왔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에게도 그런 사실을 숨겼다. 비밀은 그의 나이 70에 이를 때까지 수십 년 간 이어졌다.


자랑스러워해야 할 독립운동 전력을 왜 그렇게까지 숨겼을까. 그건 부친이 해방 후 권력을 잡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국지사 안용봉(1912년생) 선생과 그의 아들 안인영(70·마산시 내서읍)씨의 이야기다.


안인영씨는 해방 후 2년이 되던 1947년 광복절 당시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 해 창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2주년 기념식장에 연사로 나온 아버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옷을 입고 계셨지요. 당시 35세셨던 아버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수많은 청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직도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은 맞았으되 이는 완전한 해방이 아닌 껍데기 해방일 뿐입니다.' 아버지의 이 한 마디에 수많은 청중들이 떠나갈 듯 박수를 쳤지요."


당시는 이승만과 미국이 강행하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로 몰리던 분위기였다. 제주 4·3학살도 그래서 자행된 것이었다. 이듬해인 48년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만의 5·10 총선거가 치러진다. 아들은 그 때의 상황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독립운동 경력이 '비밀' 


"당시 창원 죽전 정미소에서 투표가 있었지요. 그 때 아버지께서 어린 저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아들아, 이 선거는 해서는 안 될 선거다. 우리만 선거하면 남과 북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걸 보면 얼마나 울분에 차셨으면 그러셨겠나 하는 생각이 지금 와서야 드는군요. 못난 아들이 지금에야 아버지의 큰 뜻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새겨놓은 사부곡.


알다시피 백범 김구 선생도 당시의 단정 수립을 반대했다. 마산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이 47년 2월 7일을 기해 '구국투쟁'을 벌이면서까지 단정 반대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제주도와 여순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헤아릴 수 없는 대량학살을 자행한 끝에 집권한 이승만은 단정반대에 나섰던 인사들이 눈엣가시였다. 결국 백범은 의문의 암살을 당했고, 안용봉 선생과 같은 분들은 이승만 정권의 상시적인 감시를 받는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에 강제가입하게 된다.


이승만의 정치적 보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그들을 '적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붙여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산골짜기로 끌고 가 모조리 죽여 버린 것이다. '골로 간다'는 말이 곧 죽음을 뜻하게 된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애국지사 학살한 정권 


일제는 항일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시켰지만 이승만처럼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정치적 반대자들을 죽인 것으로도 끝난 게 아니었다. 희생자의 가족들에게까지 '연좌제'의 굴레를 씌워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고, 자식들의 취직까지 철저히 제한했다. 60년 3·15와 4·19혁명으로 살인자 이승만이 물러나자 전국의 유족들이 진상규명운동에 나섰고, 당시 국회도 여기에 동참했지만, 이듬해 다시 총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그들 유족까지 다시 감옥에 집어넣었다. 유족들이 발굴해 안장한 희생자의 무덤도 다시 파헤쳐 유골을 여기저기 흩어버렸다. 부관참시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이런 공포의 세월이다 보니 안인영씨가 부친의 독립운동 사실을 자식에게도 숨겨왔던 건 당연했다. 당시의 희생자 유족들 대개가 이렇다. 보통 이들 유족은 정권에 대한 피해의식의 가역반응 때문인지, '보수·우익적 가치관'으로 무장해 있는 분들이 많다. 지난해 처음으로 선친의 비밀을 털어놓고 과거를 찾아 나선 안씨를 만났을 때도 기자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어제, 학살된 지 56년 만에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포장을 받게 됐다는 통보를 받은 그는 기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아버지의 역사를 찾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새롭게 쓰이고, 반드시 다시 정립돼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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