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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민간인학살 사건 취재기록

학살기록|2021. 5. 3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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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북도피학살자유족회 사건 탁복수 무죄판결

학살기록|2021. 5. 3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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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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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위 속기록 통영 김채호 증언

학살기록|2021. 5. 3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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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락살자 김철호의 형 김채호 당시 통영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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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민간인 집단학살 구술증언록(1)

학살기록|2013. 5. 1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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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009년 함양군 지역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관련 구술증언록이다.


면담자는 김주완이며, 증언자는 총 21명, 총 291쪽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이다.


파일이 36메가바이트에 달해 나눠싣는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구술증언록 목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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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에 학살당한 독립운동가

학살기록|2013. 4. 2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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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이었다. 60대 후반의 한 어른이 나를 찾아왔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했다는 안인영(당시 69세) 씨였는데,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찾고 싶다"고 했다. 내가 민간인학살 등 지역현대사의 은폐된 진실을 계속 취재해 보도하는 걸 보고 "이 기자에게 부탁하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창원 상남면 퇴촌리 출신 안용봉(1912~1950)이란 분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경찰에 끌려가 재판 절차도 없이 창원 삼정자동의 한 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


아들 안인영 씨.

아버지 안용봉 선생의 젊은 시절.


해방된 지 2년 되던 그 해 창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2주년 기념식장에서 연사로 나온 아버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옷을 입고 계셨지요. 당시 35세셨던 아버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수많은 청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직도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은 맞았으되 이는 완전한 해방이 아닌 껍데기 해방일 뿐입니다.' 아버지 이 한 마디에 수많은 청중들이 떠나갈 듯 박수를 쳤지요.”


그의 아버지는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고, 그 때문에 정권의 감시를 받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끌려가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개의 학살 유족들이 그랬듯 '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이 두려워 이런 사실을 평생 자식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다 정년퇴임을 했고 "내가 죽기 전에 아버지의 명예를 꼭 회복시켜 드리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다행히 안용봉 선생의 기록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와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를 통해 일제의 재판 기록과 복역 기록을 찾아냈다.


2005년 부산경남사학회 학술대회.


마침 그해 6월 부산경남사학회가 주최한 ‘한국전쟁 55주년 기획발표-한국전쟁시기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문제’ 학술발표대회가 열렸다. 그날 나도 ‘보도연맹원 학살과 지역사회의 지배구조-경남 마산지역의 사례와 인물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는데, 아들 안인영 씨는 청중석에 끝까지 앉아 발표를 지켜봤다. 70의 나이에 다시 역사 공부를 시작한 셈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재판기록과 학살당했다는 증언 등을 첨부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지정을 신청했고, 이듬해인 2006년 8월 광복 61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아 독립유공자가 됐다. 아버지의 명예가 공식 회복되는 날 아들 안인영 씨는 기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이 이렇게 나쁜 인간인줄 정말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역사를 찾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새롭게 쓰이고, 반드시 다시 정립돼야 한다는 사실을."


그 후 창원시 동읍 국도를 지나다 낯익은 이름이 적힌 표지판을 발견했다. '애국지사 안용봉 선생 묘지'였다.







2006년 안용봉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확정되었을 당시 내가 썼던 칼럼을 첨부해놓는다.


아들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한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자랑스러운 항일 경력을 철저히 비밀로 간직해왔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에게도 그런 사실을 숨겼다. 비밀은 그의 나이 70에 이를 때까지 수십 년 간 이어졌다.


자랑스러워해야 할 독립운동 전력을 왜 그렇게까지 숨겼을까. 그건 부친이 해방 후 권력을 잡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국지사 안용봉(1912년생) 선생과 그의 아들 안인영(70·마산시 내서읍)씨의 이야기다.


안인영씨는 해방 후 2년이 되던 1947년 광복절 당시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 해 창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2주년 기념식장에 연사로 나온 아버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옷을 입고 계셨지요. 당시 35세셨던 아버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수많은 청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직도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은 맞았으되 이는 완전한 해방이 아닌 껍데기 해방일 뿐입니다.' 아버지의 이 한 마디에 수많은 청중들이 떠나갈 듯 박수를 쳤지요."


당시는 이승만과 미국이 강행하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로 몰리던 분위기였다. 제주 4·3학살도 그래서 자행된 것이었다. 이듬해인 48년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만의 5·10 총선거가 치러진다. 아들은 그 때의 상황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독립운동 경력이 '비밀' 


"당시 창원 죽전 정미소에서 투표가 있었지요. 그 때 아버지께서 어린 저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아들아, 이 선거는 해서는 안 될 선거다. 우리만 선거하면 남과 북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걸 보면 얼마나 울분에 차셨으면 그러셨겠나 하는 생각이 지금 와서야 드는군요. 못난 아들이 지금에야 아버지의 큰 뜻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새겨놓은 사부곡.


알다시피 백범 김구 선생도 당시의 단정 수립을 반대했다. 마산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이 47년 2월 7일을 기해 '구국투쟁'을 벌이면서까지 단정 반대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제주도와 여순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헤아릴 수 없는 대량학살을 자행한 끝에 집권한 이승만은 단정반대에 나섰던 인사들이 눈엣가시였다. 결국 백범은 의문의 암살을 당했고, 안용봉 선생과 같은 분들은 이승만 정권의 상시적인 감시를 받는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에 강제가입하게 된다.


이승만의 정치적 보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그들을 '적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붙여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산골짜기로 끌고 가 모조리 죽여 버린 것이다. '골로 간다'는 말이 곧 죽음을 뜻하게 된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애국지사 학살한 정권 


일제는 항일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시켰지만 이승만처럼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정치적 반대자들을 죽인 것으로도 끝난 게 아니었다. 희생자의 가족들에게까지 '연좌제'의 굴레를 씌워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고, 자식들의 취직까지 철저히 제한했다. 60년 3·15와 4·19혁명으로 살인자 이승만이 물러나자 전국의 유족들이 진상규명운동에 나섰고, 당시 국회도 여기에 동참했지만, 이듬해 다시 총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그들 유족까지 다시 감옥에 집어넣었다. 유족들이 발굴해 안장한 희생자의 무덤도 다시 파헤쳐 유골을 여기저기 흩어버렸다. 부관참시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이런 공포의 세월이다 보니 안인영씨가 부친의 독립운동 사실을 자식에게도 숨겨왔던 건 당연했다. 당시의 희생자 유족들 대개가 이렇다. 보통 이들 유족은 정권에 대한 피해의식의 가역반응 때문인지, '보수·우익적 가치관'으로 무장해 있는 분들이 많다. 지난해 처음으로 선친의 비밀을 털어놓고 과거를 찾아 나선 안씨를 만났을 때도 기자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어제, 학살된 지 56년 만에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포장을 받게 됐다는 통보를 받은 그는 기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아버지의 역사를 찾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새롭게 쓰이고, 반드시 다시 정립돼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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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청년방위대원도 6.25때 학살당했다

학살기록|2008. 7. 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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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국전쟁 때 노근리사건이나 보도연맹 사건과 같은 민간인학살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와 여러 사회단체의 노력으로 상당수 실체가 드러나 있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의 지도감독을 받았던 준군사조직이었던 청년방위대원들이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처형된 사례는 밝혀진 게 없었다. 어쩌면 학살의 가해자 쪽으로 분류될 수도 있었던 청년방위대원들이 피학살됐던 사연은 뭘까.

이 사례를 처음으로 발굴한 충북역사문화연대 김순애 교육부장의 취재기를 공개한다. 이 글을 계기로 기성언론들의 보충취재와 보도도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내가 녹음기와 캠코더를 들고 싸돌아다니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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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거의 매일 충북 영동에 간다. 이렇게 싸돌아다니는 게 나의 직업이다.

날이 더워져서 에어컨 안 나오는 마티즈 타고 고속도로를 탈 때면 조금 괴롭다. 그러나 영동만 들어서면, 울창한 산과 강과 바람 덕에 더위를 모른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놈이 촌스럽다며, 안 들겠다고 팽개쳐, 내 차지가 된 멜빵가방엔 디카와 녹음기, 수첩과 자료로 비좁다. 그리고 어깨엔 캠코더와 삼발이를 맨다.

왜 이렇게 준비물이 많냐구? 나의 출장은 옛이야기를 묻고 찍고 기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채록하는 이야기는 먼 일제 때부터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다.

마을에서 어르신을 만나면, 꾸뻑 인사한다. 그리고 “할아버지, 전쟁 때 여기에서 보도연맹원으로 죽은 사람이 있나요?”하면, “그건 왜 물어?”하고 의심스레 쳐다본다. “예,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분들 명예회복 시켜 드리려구요”하면, 그제서야 “그때 하도대리에서 많이 죽었지. 그 상황을 잘 알려면 남○○ 찾아가 봐”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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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똥을 맘껐 따먹게 해준 할머니(남우현의 처)

한 여름에도 물이 차갑다는 물한리계곡을 좌측으로 끼고 하도대리 본동 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에서 83년간을 살았다는 남우현 할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 찾아간 날은 할아버지가 들에 나가셨다. 이틀 후 다시 찾아가니, 이번엔 황간향교에 가셨단다.

“아이구 뵙기 힘드네요”하니, 할머니가 “보리똥하고 앵두 좀 따먹고 가”하신다. ‘에이 보리똥으로 배나 채우자’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많이’ 따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오셨다.

최초발굴 : 영동군 청년방위대원이 집단 처형된 사연

“어쩐 일이래요?”, “예. 6.25때 마을역사를 알려구요”하니, 전쟁 나기 전 '청년방위대'에 근무했던 일부터 입이 열렸다. “상촌국민학교에서 약 40~50명이 한 달간 훈련을 받았는데, 하루는 영동읍에 신무기교육을 받으러 간다구 20명을 차출하더라구.”

그런데 놀라운 이야기가 나왔다. 경산으로 간 20명 청년방위대원 중 10여명 국민보도연맹원이 경산코발트광산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 9명이 하도대리 청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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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상촌면 청년방위대 사무실 터에서(증언자 남우현과 충북역사문화연대 운영위원장 박만순)

이제까지 영동지역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20일 영동읍 어서실, 석쟁이재와 상촌면 상도대리와 고자리에서 300명 가량이 처형되었다고 알려져 왔었다. 그런데 어떻게 상촌면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산코발트 광산에까지 끌려가서 집단처형 되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청년방위대는 대한청년단이라는 단체에서 시작됐지만, 전쟁 때는 국방부의 지도감독을 받는 준군사조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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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증언하는 남우현 할아버지.

이 궁금증은 남우현 할아버지의 3시간에 걸친 증언과 관련 비문에 대한 현장 안내를 통해 해소될 수 있었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이 함락되고, 영동에는 다음날인 7월 21일 소개령이 내려졌어. 아내와 노부모를 남겨 논 채 마을 청년 11명이 피난증을 가지고 피난을 갔어. (영동군)매곡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에는 경북 김천가서 잤지.

그러다가 경북 경산을 가게 됐는데 아는 사람의 연고로, 코발트광산의 여관에 묵게 됐어. 하루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지에무씨(GMC)에 사람을 가득 싣고, 어디론가 달려. 트럭 네 귀퉁이에는 한사람씩 앉아있고 말여. 한시간을 앉아 있는 동안 40대가 지나가. 그런데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그러는 겨. 나중에는 노인도 실려 있더라고. 근데 그때는 트럭에 실린 사람이 누구고 어디로 가는 지 몰랐지.”

이들이 보도연맹원들이고, 영동군 청년방위대원 중 보도연맹원들이 끼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경산국민학교에 영동군 청년방위대원들이 있다는 겨. 그래서 마을 친구들도 볼 겸 갔지. 마침 정문초소에 친구가 있더라고. 그런데 경산국민학교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어.”

그러다 남우현씨는 방위군 장교 박홍기를 만났다. 박홍기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경산초등학교 운동장에 청년방위대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장부책을 놓고 하는 말이 ‘보도도연맹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눈감고 손들어’하데.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서 나가니까 교실로 데리고 갔어. 이들을 코발트광산으로 끌고 가 전부 처형했지. 내가 미리 내막을 알았더라면 동네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해서 상촌면 하도대리에서만 9명의 꽃다운 청년들이 코발트광산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학살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남승길(본동), 남칠현(본동), 남호현(본동), 이병덕(본동), 남응현(본동), 송정호(신기), 남승만(신기), 김창은(신기), 남종(소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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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랑비 측면의 국가유공자 명단.

그런데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 하도대리 마을자랑비에 국가유공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마을의 유래와 열녀를 소개한 마을자랑비 옆면에는 한국전쟁기 국가유공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비석에 9명의 코발트광산 희생자 명단이 섞여서 실려 있는 것이다.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순애(충북역사문화연대 교육부장)

용화면 청년방위대 인솔자 강태석 소대장의 고백(녹취록 요약)

증언일시 : 2008년 2월 13일
출생년도 : 1929년.
출 생 지 :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 내룡.

1943년 용화공립심상소학교 졸업했다. 17살 때 해방이 되었다. 용화광산에 있던 라디오를 듣고 해방을 알았다. 해방 후 용화에는 대동청년단이 있었다. 나도 대동청년단에 들었다. 단장이름이 정용석이던가 그렇다. 그분은 6.25때 장교로 전사했다. 용화국민학교에 모여서 연설을 들었다. 그때 부락에서 야경을 하고 초소막을 지어 놓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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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석 당시 청년방위대 용화면 소대장.

영동면화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대한청년단 훈련을 받았다. 100명이 넘었다. 면에서 좀 똑똑한 사람을 불러서 훈련을 했다. 그때 김영철이 교관이었다.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중대장은 이경승이었다. 소대장은 김긍식(어디사람인지 모름), 흘계사람 최양열, 월전리의 이조승, 용화리의 강태석이었다. 소대장이 리별로 다 있어야 하는데, 여건상 자계리와 용강은 정식임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소대장을 했다.

나는 수원 방위사관학교 5기생이다. 그때 동기생은 약 200명 쯤 된다. 양강면의 장시문 장구섭이 동기생이다.

권준대령이 지은 작전요무령을 배우고, 여순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장교들만 보았다. 그 영화는 사병들은 못 보았다. 1달 훈련을 받고, 50.5.31 임관했다. 임관 후 조동소대로 배치되었다. 대원이 조동과 안정리를 합쳐서 50~60명, 자계리 구백이 횡지 여의리 합쳐서 100여명, 용강리가 30명, 월전 흘계리가 50명, 용화 내룡 창골 합쳐서 50명 정도였다. 용화면 전체 청년방위대 대원이 대략 300여명이다.

6.25가 나자 전(全)대원을 용화국민학교에 집합을 시켜서, 이경승 중대장이 65명 지원을 받았다. 영동가서 1주 훈련하고, 완전무장하고, 고향으로 돌아 와 공비토벌하라고 했다. “강소위는 미혼이고, 혼자니까 거리낌이 없다. 적임자다. 훈련받고 이런 일을 하라”고 했다. 22살 때인데 무서운 줄을 모르고 하겠다고 했다.

7월 15일쯤에 영동에 나왔다. 도보로 영동에 나와 보니까 현역연대였다. 영동에서 1주일 정도 있었다. 5신병교육대 몇 중대에 편성이 되었다. 대장이 이대영 중령이었다. 무주사람과 영동사람 혼성팀이었다. 2-3일 수류탄 투척 각계전투 훈련을 하다보니까, 심천방향에서 불이 환하게 올라갔다.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대포가 올라가는 거라고 했다.

5~6살 더 먹은 선배들이 저녁마다 어디 갔다 오더니 추레했다. 고문을 받았는데, 보련(국민보도연맹)에 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잡아다가 캐묻는다고 했다. 보도연맹에 들은 사람들 나오라고 할 때, 벌써 신병교육연대에서는 벌써 그 명단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신원조회 해가지고 고향으로 쫓아 버릴 려나 보다’하고 그 사람들이 그때 이름 써서 냈다. 집으로 보낼 줄 알고 “같이 가자, 가자”하며 들었다. 그 사람들이 5신병교육대 연대본부에 가서 고문을 받았다. 5신병교육대 연대본부는 영동농협 맞은편에  일본사람이 살던 2층 목조집이었다.

숙소는 중국사람 천성태씨 집이었다. 거기 비어 있는 집에 가서 숙식을 했다. 방이 교실만큼 컸다.
 며칠 후 밤에 10시 넘어서 정거장으로 인솔하라고 했다. 인솔 중에 오포대 넘어 영미사진관이라고 있었다. 거기에 미군들이 와 있었다. 미군인데 흑인이 한국말을 했다. 어머니가 한국사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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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코발트 광산 유해발굴 장면.(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짐싣는 차를 타고 2~3시간을 지나 한 12시가 넘어서 기차가 떠났다.  심천에서 대포가 올라가는 걸 보고 2-3일 쯤 후에 기차를 탔는데, 7월 20일쯤일 것 같다.  영동역에서 기차에 탄 사람들은 용화면사람 65명과 무주사람이었다. 용화・무주 중대장은 진경준 중대장이었다. 그리고 영동군내 다른 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용화면 사람만 기억하지 다른 면 사람들은 모른다. 날이 샐 때 쯤 보니까 대구 시내를 지나는 중이었다.

한참 있다가 경산에서 내렸다. 경산중앙국민학교로 데리고 갔다. 낮에는 교육 훈련을 했다. 그러다 2~3일 후에 보련에 가입한 사람들을 전부 빼내서, 6중대라고 새로 중대를 편성을 해서 강당에 집어넣었다. 머리를 빡빡 깎아서 집어넣었다. 강당에 넣은 지 5~6일, 근 일주일 있었다. 강당에는 한 100여명이 있었다. 용화면 사람은 22명이고 더 있을 수도 있다. 설천면 사람도 두 명이 아는 사람이 있었다.


영동에 있을 때 밤에 고문당하고 추레하게 있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보도연맹으로 불려간 용화면 사람들 22명 이름을 손으로 꼽는다.

안정리 이갑문, 조동리 박태하・정규태・박규성・이남희(이명 이재춘)・양상수・이종관(동창)・강원형(동창)・김삼조(나이 많다), 창골의 장재호(선배)・강영희・이갑봉, 용화의 양도영(동창)・최창덕, 하용강의 김용한, 구백이의 김해봉, 횡지의 김종진, 여의리의 이시영, 흘계의 강낙희, 월전의 임원승・김삼봉・박달준씨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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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된 유해.


그리고 무주군 설천면 사람도 있었다. 기곡리의 퇴일동네에 살던 동창생 박래한과 김옥래가 확실히 6중대에 들어갔다. 양강사람 장시문이 예비군 중대장을 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집에서 죽었다.

경산국민학교에서 6중대를 따로 분류할 때 불길한 마음이 들어, 청방교육대 정보과로 가서 “왜 따로 놓느냐”고 물으니까 육군중령이 “걱정말라”고 했다. 근데 그날로 다 데리고 갔다. 방위장교한테 물으니 “헌병들이 와서, 엮어서, 싣고 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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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_top_blogtop=go2myblog BlogIcon 실비단안개 2008.07.08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중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2. 육방(육개월 방위) 2008.07.08 2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배님들이 저런 고초를 겪었다니 가슴이 아프네요.
    그런데 왜 현역에 입대하기 위한 방위대원들이 광산에서 죽었나요?
    방위는 사람이 아닌가요?

  3. 진지 2008.07.09 0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촌면이 우리 고향인데~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전쟁이 나서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입대 했는데,
    그중에 보도연맹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니. 이해가 안 간다.
    글을 읽어 보니 하도대리 사람 9명이 죽었다는데, 정말 사실인가?
    믿을 수가 없다.
    누군가 답좀 해봐요~

  4. 짱돌 2008.07.09 0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첨에 사진이 이상해서 여기 글을 읽었다.
    근데 이게 모냐?
    강가에 뒹구는 자갈도 아니고 다 사람들 뼈라고..
    참 ..심하다!!

  5. Favicon of https://armishel.tistory.com BlogIcon 아르미셸 2008.07.09 05: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말을 이해하려면 보도연맹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해방이 될 당시 남한에는 공산주의에 접했었거나 그와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는 이들이 있었고 사상관련 문제로 체포된 이들에게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준다는 의도로 보도연맹이라는 것이 조직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잘 설명해줄 분들이 많을테니 약간 더 검색해보시고요,

    사실, 이 보도 연맹원 중에는 공산주의자였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냥 동네별로 할당되었다던지 하는 이유로 별 상관없는 이들까지 관련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에 대한 시선은 급냉각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북한과 싸우는 상황에서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의혹의 화살이 이들에게 돌려진 것이죠. 또, 보도연맹원의 일부가 남침해온 북한군의 편을 들어서 그 동안 입었던 불이익을 보복했다는 소문들이 퍼지자 이들에 대한 학살이 전국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부족해서 추측등에 의존하는 바가 많고 어느 정도 윗선까지 보도연맹 학살에 연관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상당히 고위층까지 연관되어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한 것이고요, 문제는 앞에도 설명했듯이 보도연맹원 중에는 실제로는 공산주의랑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까지 있었지만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국군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점점 학살은 무분별하게 확대되었습니다. 그러한 학살과정의 일부에 해당되는 사건이라고 보이네요.

    저도 전공이 아니라서 많이 아는 것은 없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숨겨진 과거들이 뜻있는 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데 일이 잘 되어서 다시는 이렇게 불행한 과거가 재현되지 않도록 했으면 합니다.

  6. 흑비 2008.10.10 1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전쟁은 북한에게만 책임이 잇는것이 아니다 남한의 무책임한학살을 방치하고 실행한 정부와 국군의행동이 역겹다 희생자의 가족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제라도 이루어져야한다 자기들 가족아라고 하면 그럴수 잇겟나 살인마들아....

  7. 장영철 2009.04.07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억울하게 죽어간 순박한 우리의 조상들.힘을 길러야 함부로 못할겁니다.

한국에서 하나뿐인 경찰관 공덕비

학살기록|2008. 6. 2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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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1950년대 용화리 전경.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에는 아주 특이한 비석이 있습니다.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입니다.

이 경찰관은 상부의 지시를 거역하여 민간인 집단학살을 막은 분입니다. 경찰관에 대한 이런 종류의 비석은 아직까지 전국에 유일합니다. 또한 이 공덕비의 존재가 매체를 통해 알려지는 것도 이 포스트가 처음입니다.

민주지산 아래의 특이한 비석

이 비석은 죽음의 구렁텅이에 내몰린 지역 주민들을 자기 목숨을 걸고 살려 준 이섭진 지서장의 아름다운 인간애를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용화리 주민들이 십시일반 마음과 돈을 모아 세운 비석입니다. 살아난 사람들은 국민보도연맹원입니다. 그는 한국판 쉰들러였던 셈입니다.

56년간 비바람을 맞아, 글씨가 흐리지만 알아 볼 수는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支暑主任 李燮晉 永世不忘碑

剛明莅事 濟之慈仁 (강명이사 제지자인)
鎭玆一區 傍及外鄰 (진자일구 방급외린)
家家懷德 人人迎春 (가가회덕 인인영춘)
路上片石 永年不泯 (노상편석 영년불민)

-檀紀 四二八五年 十一月 十一日 住民一同-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

강직하고 현명하게 일에 임하여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사람을 구했네
한 고을을 잘 다스리니 그 덕이 이웃에까지 미쳤도다.
모든 사람들이 봄을 맞이하듯 집집마다 그의 덕을 기억하여
비록 길가에 세운 조각돌일지라도 영원히 잊지 말자.

-1952년 11월 11일 주민일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섭진 지서장 영세불망비.


전국에는 한국전쟁기에 보도연맹원을 포함해 민간인학살 과정에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지역유지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세워진 비석이 몇 개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제주도 대정읍 하모리 진개동산에 마을 주민들을 살리는 데 공이 많은 김남원 면장과 조남수 목사의 공덕비입니다.

하지만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에 대한 공덕비는 이곳에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예비검속 된 수 백 명의 지역민들을 살리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문서장의 공덕비를 함께 세우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희생자 위령비가 없는 상태에서 경찰출신의 공덕비를 먼저 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세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 등을 살려주어, 마을 주민과 유족들이 세운 경찰공덕비로는 '이섭진 영세불망비'가 전국에서 유일한 것입니다.

용화면 보도연맹원 30여명이 살아난 이유

전쟁이 발발하고, 대전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1950년 7월 19일 용화면 보도연맹원들이 모였습니다. 아침 일찍 순경이 마을에 와서 “보도연맹원 소집교육이 있으니 반드시 참석하라”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인 3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은 낮에는 돌로 지서울타리를 쌓는 작업을 하고, 밤에는 용화초등학교 뒤 창고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바쁜 농사철에 1박 2일의 소집교육이 무척 불만이었지만, 내일이면 집에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잠을 청했습니다. 내일이면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린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사용자 삽입 이미지상촌면 상도대리 숯가마.사용자 삽입 이미지영동대 부근 석쟁이재.사용자 삽입 이미지영동읍 부용리 어서실.

용화면처럼 영동군 내 모든 읍면 보도연맹원들은 영동경찰서나 지서에 소집되어 하룻밤을 잔 후, 그들이 상상도 못한 일을 당합니다. 군인들의 총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영동군 내 30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은 7월 20일 영동읍내 어서실과 석쟁이재, 상촌면 고자리에서 집단학살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영동군에서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용화면 보도연맹원들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순전히 의로운 경찰 이섭진 지서장의 용기 있는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섭진 지서장(사진 우측).


전쟁 당시 용화지서장을 맡고 있던 이섭진은 1950년 7월 18일 오후에 영동경찰서장의 긴급호출을 받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해 보니 모든 지서장들이 참석해 있었습니다.

김경술 서장은 참석한 지서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오전에 (이시환)도경국장과 특무대(CIC) 파견대장으로부터 지시받은 사항입니다. 내일 중으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모두 격리하라는 지시입니다. 오늘부터 유치장도 특무대가 관리한답니다. 전시 비상계엄 하에서 어쩌겠소. 군에서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남부 네 개 면은 황간지서로, 용화면은 용화지서로, 영동읍을 비롯한 나머지 여섯 개 읍면은 경찰서 수사계로 인계하되 황간지서장과 용화지서장은 지서나 창고에 이들을 집결시켰다가 특무대에 인계하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교육소집이니 한사람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바로 실행하십시오.”

지시사항을 들은 이섭진 지서장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처형하겠다는 뜻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6개월 전에 정부에서는 과거 좌익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북한과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하겠다’라는 취지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든 것이 아닌가? 또한 보도연맹원 대다수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자무식의 농사꾼들이지 않은가? 해방 후 격동기에 “농토를 나눠 준다”, “비료 배급해 준다”라는 이야기에 도장을 찍은 것이 남로당원 가입서이고, 농민회 가입서 였고, 이것이 자동으로 보도연맹 가입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전향을 시켜 보호하겠다’라는 취지는 어디 가고, 모두 죽이겠다라는 것인지.....

이섭진 지서장은 부인 박청자와 상의 후에 자기 목숨을 걸고 서라도 보도연맹원을 살려 주어야 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7월 19일 오후, 보도연맹원 한 사람을 데리고 창고로 갔습니다. 창고는 일제 때 지은 것으로 나무 판자를 엮어 흙을 바른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낡고 허름했지만 30여 명은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섭진은 널빤지를 구해다 허술하게 봉창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철사나 끈을 자를 수 있는 칼과 가위를 하나씩 창고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지서로 돌아오는 길에 이섭진은 동행한 보도연맹원에게 은밀히 당부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상촌면 고자리 현장과 유족들.


“무슨 일이 생기면 아까 막아둔 봉창으로 빠져 나와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게. 이유는 묻지 말고. 그리고 지금 내가 한 말을 절대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안 되네.”

이 이야기에 눈치를 차린 보도연맹원들은 그날 밤 모두 탈출을 했습니다.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었습니다.

용화면 보도연맹원 중에 죽은 사람들은 청년방위대원으로 전쟁 직후에 자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수복 후, 이섭진 지서장의 아름다운 행동은 순식간에 용화면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집니다. 1951년 말 이섭진은 매곡지서장으로 발령을 받는데, 이를 아쉬워하는 용화주민들은 지서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해 11월 11일 주민들은 이섭진 지서장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는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를 세웠습니다.

/박만순(충북역사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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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헤메는 발길 2008.06.21 11: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지서장님은 참 훌륭하시고 세세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공직자가 자기의 임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하기 보다 인간에 대한 존엄을 우선시 하는 행동은 오늘날의 검경찰도 꼭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3. 개구쟁이 2008.06.21 1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분을 경찰청장으로 만들어야하는데..어쩌고,,
    장하시네요
    존경스럽네요.
    우리민족의 우상이 되길..아니 경찰의 우상이길...

  4. 팔도사나이 2008.06.21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고향이 영동이고 친구집이 용화면인데..
    함 찾아가야 겠습니다..
    존경합니다~~

  5. 우리집강쥐바기 2008.06.21 1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정한 경찰이고 진정한 공무원이네요.

    지금도 묵묵히 국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있는 현실을 보면 또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네요.
    저런 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존경합니다.

  6. 이회창애비 2008.06.21 12: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회창애비 비석있냐? 이놈들아?

  7. 살고싶은 한국인 2008.06.21 1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사람이 지금도 대한민국에 있어야 하는대 지금 있을까 없을까 내가 한번해보면은 좋을것같은대 정말로 그런 경찰이 단한명이라도 존재할까 정말로 궁금하내 내 생각은 없다로 결론을 짖어본다 있으면은 이리될까

    • 정일사랑 2008.08.26 0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찰관이 아니시더라도 많으시죠.

      요사이 소방 공무원님들 자신의 일에 충실히 하시다가

      순직하시는분 이섭진지서장님 못지않게

      우리가 고마워하고 감사해야분들이네요.

      그 당시일들을 생각하니 맘이 넘아프네요. 일반 민간이이 아무것도 모르고 많이 죽었다는것이 맘아픔니다. 그와중에서 칭송할만한 경찰관님이 계셨다는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고 눈물이 납니다.

  8. 객인 2008.06.21 1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덕비 : 선정(善政)을 베푼 감사(監司)나 수령(守令) 등이 갈린 뒤에 그들의 공덕을 기리어 그 고을 주민들이 세운 비석(碑石).

    절이나 기관에서 세워주는것은 이름만 공덕비이지 실제 뜻과는 괴리가 있습니다.
    지금 이 글쓰신분이 말씀하시는게 맞습니다. 이게 처음이 맞고 한개가 맞습니다.
    다른것들은 단체나 기관에서 감사의 뜻으로 세운것이고, 공덕비의 본래의 뜻을 가진것은
    저것밖에 없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9. 네이티 2008.06.21 1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은, 사람다워야 사람입니다. 요새는 사람다운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죠?

  10. 용궁물랫 2008.06.21 1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용인서장 공덕비도 있는데요 인터넷검색 곡성서장

    • 정일사랑 2008.08.26 0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이버 야휴에 발견 안되네요.자세히 주소를 써주시면 좋것네요
      그러구,공덕비가 하나건 두개건 열개먼 더 좋겠지만, 여기서 댓글로서는 의미는 별루네요

  11. 여인천하 2008.06.21 1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훌륭하신분입니다. 아마 격동기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렇게 노력하신분들이 많을겁니다.

  12. 광장 2008.06.21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글을 읽으며 좌우가 싫어진다.

    이분은 쉰들러 좌파의 귀감이며

    이분은 친일파 우파의 표상이다.

    필요하면 친일파요,필요하면 빨갱이니

    도대체 이사람의 근본은 무엇인가?

    살려고 하는짓에 그무슨 의미부여

    그것을 선현들은 곡학아세 표현하네

    독도수비 당연히 먹고살려 한일인데

    어느신문 독도수비 미역채취 운운하네

    먹고살려 땅지키지 명예타려 땅지키냐?

    지금은 그기사 찾을수도 없다네

    기사발굴 좋다지만 보도연맹 빼버리면

    이분은 영락없이 친일의 앞잡이네

    • 태린맘 2008.06.26 1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희 할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잘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신지..친일 앞잡이라고 하셨나요? 당시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표현하시는게 지나치시네요..
      안타깝습니다..

  13. 은하수 2008.06.21 15: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몰랐던 것을 알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제 고향 근처인데도 아직껏 그러한 사실이 있는지도 모른채 살아왔습니다... 고향가는 길에 한번 들러 그분의 덕에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것 같아서...그리고 위 글을 빌려갑니다...

  14. 부사리 2008.06.21 1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에서 하나뿐이라는것은 님께서 모르시고 쓰신 글인것 같습니다.
    6.25사변때 지리산 일대에 빨치산이 활동 거점으로 삼아 맹위를 떨치고있을때
    지리산 화엄사를 중심으로 빨치산이 활동을 한다고 경찰 수뇌부에서
    화엄사를 불태우기로 결정을 하고
    소각명령을 내렸읍니다.
    그러나 당시 토벌대장이었던 차일혁총경은
    문화재를 소각하는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일이라고 하면서
    상부의 명령을 듣지않고 화엄사를 지켜냄으로써
    화엄사를 지킬수 있었기에 이에 고마움을 표하기위해
    화엄사 경내에 구례군민과 화엄사가 공동으로 공덕비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15. 또롱 2008.06.21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려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16. 태린맘 2008.06.24 14: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모가 daum블로그에서 할아버지 존함을 쳐보라고 하셔서 이 글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 내용이 책으로 나오기전에도 엄마한테 외할아버지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어요..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땐 그저 엄마의 아버지이고 나의 외할아버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훌륭하신 분인지 나중에야 알았어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엄마가 할아버지를 그리워하시면서, 역사에 남을 훌륭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내용 외에도 할아버지가 크리스찬으로서 얼마나 믿음이 강한 분이셨는지,
    항상 약자의 편에서 방패가 되셨다는 말씀도 들었어요..
    그 뒤엔 늘 할머니의 기도가 있었다는 것도..

    책이 나왔을 때, 할아버지 일대기가 책으로 나왔으면 하셨던 엄마의 바램이 부분이나마 이루어진거 같아서 감사했는데, 블로그에도 기사화되어 더 감사한 마음이에요..
    할아버지의 공을 알려야 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처럼 적막한 세상에서 한 줄기 희망이 되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그게 할아버지가 실천한 사랑이니까요..

    엄마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워 하셨던 할아버지..저도 정말 자랑스러워요..
    천국에서 지켜보고 계실 엄마와 할아버지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글 감사합니다..

    • 선산을 지키는 나무 2008.06.25 0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엄마가 돌아가셨군요. 가족은 너무 가까워서 늘 모르고 지나는 것이 있기도 하지요. 할아버지랑 엄마가 다른 영역에서 미소 띄우고 있을 것 같아요. 살아있건 그렇지 않건 다정한 가정이시군요...따뜻해서 참 좋아요..내내 행복하세요. 글고 좋은 가정 이루실 것 같아요^^

    • 정일사랑 2008.08.26 0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라서 눈물이 납니다.

  17. 코알라 2008.06.24 1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린맘 누구인가?
    글로봐서는 내조카님인데.....
    오늘도 너희엄마 예기를 많이했고 안타까왔다.. 그리고 보고싶고.....
    누구보다도 좋아하고 기뻐했을것을 ...

  18. 영민 2008.06.26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아버님의 이야기을 읽어주시고 뎃글을 달아주시고 관심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부모님께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셨읍니다 두분께서는 밤세워 눈물로 기도하시고 그일을 하셨읍니다 부모님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하지아니하시고 그분들을 위하여 밤새워기도하셨읍니다 무척 두려웠다고 하셨읍니다 종교적인 차이점은 있겠지만 그순간 그런 결정을 하신것은 그분들의 하니님에 대한 믿음으로 선택하신일입니다 오해없으시기바랍니다 또 52년 매곡에서 또한번 기도하시며 실행하신일이있읍니다 책에는 나와있읍니다 그때도 목슴을 걸고 하셨읍니다 그리고 저희 부모님은 30세에 그일을 하셨읍니다 어머니는 만삭이셨구요 어머님은 금식하며 기도하셨읍니다 저희아버님은 절대로 친일파도 일본군앞잡이도 아니싶니다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관십 보여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정일사랑 2008.08.26 0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에서 최고로멋진 경찰관 아버지 어머님를 두셧네요.

      저두 멋진 이섭진 경찰관님이 계셨다는것이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합니다.

  19. 원형 2008.08.26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때나 지금이나 이념이 뭔지..
    참 ...눈물이 나네요...

  20. Favicon of http://교ㅛㅑㅐ BlogIcon 박진 2008.10.08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서장님의 그후 행적이 궁금 합니다

  21. 의산 2017.07.09 1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훌륭한 분.
    그런데 책 이름은 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