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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록

임플란트 수술 통증 얼마나 될까

기록하는 사람 2015. 8. 2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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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른쪽 아래 어금니 쪽에 임플란트 2개를 심었다. 완성된 것은 아니고 막 기초공사(1차 수술)를 한 셈이다. 앞으로 경과를 지켜보고 2차 수술과 보철이라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렇게 완성까지는 약 6개월 정도 걸린다고 한다. 물론 경과에 따라 좀 앞당겨질 수도 있다.


수술에 앞서 입 안 오른쪽에 마취주사를 놓았다. 주사기가 입안으로 들어올 때 내가 움찔하는 바람에 의사가 "의외로 겁이 많네요"라고 한다. 민망했다.


다음에는 간호사(치위생사인가?)가 무슨 약물로 입안을 소독했다. 그리고 입을 한 번 행구라고 하더니 가글과 비슷한 구강소독액을 30초간 머금고 있다가 뱉으라고 한다. 그 상태로 입을 다물고 있으란다.


이윽고 입을 다문 상태에서 입술과 입 주위를 또 소독한다. 그리고 입 주위에 손을 대지 마라고 한 후 한참을 기다리게 했다. 무료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그렇게 약 40분이 흘렀다. 간호사 말로는 수술하는데 그리 시간은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의사가 왔다. 나는 누웠고, 얼굴은 입만 둥글게 내놓은 채 초록색 천으로 가려졌다. 의사가 마취 효과 점검을 위해 입안 어딘가를 누르며 "아프냐"고 물었다. 고개를 저었더니 본격 수술이 시작되었다. 드르르르... 위위잉... 드릴로 윗몸을 마구 헤집는 듯한 느낌이 왔다. 10여 회 정도 그런 작업을 하더니 이번엔 나사못을 기계로 돌려 박는 느낌이 왔다. 대대적인 공사였다. 마취 상태이니 아프진 않았지만 공포심으로 수술 내내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임플란트 구조. 출처 : 한결치과의원 http://blog.naver.com/allabaechu/220048176853


마침내 수술이 끝나고 입안의 침을 뱉어내니 약간의 피가 함께 나왔다. 간호사가 주의사항을 일러준다.


1. 3~4시간 후 마취가 풀릴 거다. 그때까진 음식을 먹지 마라. 특히 내일까진 찬 음식을 먹고, 뜨거운 음식은 피하라. 자칫 지혈이 안 될 수 있다.

2. 수술 후에 약간의 출혈이 있으나 맺지 말고 삼켜라. 역시 지혈이 안 될 수 있다.

3. 수술 부위를 혀나 손으로 만지지 마라.

4. 처방한 약(5일치)은 꼭 먹어라.

5. 심한 운동이나 사우나, 찜질방은 피하라. 역시 지혈이 안 될 수 있다.

6. 수술 부위가 부을 수도 있으니 내일까지 수시로 얼음찜질을 하라.

7. 잇솔질은 수술하지 않은 부분은 평소대로 하되 수술 부위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라.

8. 식사 후에는 소독물약으로 소독하라.

9. 술은 2주일, 담배는 2~3개월간 피하라.



이런 내용이었다. 언제 할진 모르겠지만 2차 수술할 때도 마취를 하는지 궁금하다. 그동안 잇몸 치료하느라 여러 번 마취를 당해봤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되고 무섭다. 마취가 풀릴 때까지 해당 부위의 무감각도 영 불편하다. 병원에서 나서니 11시 45분이었다. 1시간 40분 정도가 걸린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1차 수술을 마치고 나니 한시름 놓이긴 한다. 사실 오늘이 가까워오면서 계속 무서움증도 높아져왔다. 임플란트 하지 말고 그냥 불편한대로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채현국 선생 말씀대로 "그만 처먹으라고 빠진 건데 그걸 또 해 넣어?"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치과 공포증을 갖게 된 까닭 


내 치아는 어릴 때부터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보다  어린아이들 네댓 명을 리어카에 태우고 경사진 길을 달려내려 오던 중에 사고가 발생했다. 속도가 빨라지니 리어카에 탔던 아이들이 어쩌다 뒤로 몰린 모양이었다. 그러니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운전하던 내가 공중에 붕 떠버렸다. 발이 땅에 닿이지 않으니 방향 조절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동네 어귀에 있는 마을 표지석을 사정없이 들이박았다.


이 사고로 아래 앞니 세 개가 빠져버렸다. 위 대문니 사이도 약간 깨져 틈이 벌어졌다. 머리도 터졌다. 그러나 당시엔 119구조대나 응급차도 없을 때였고, 나는 의사도 약사도 아닌 약방 주인에게 깨진 머리를 기웠다. 빠진 이는 뒤에 탔던 아이들이 주워왔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였나? 어머니가 어디론가 나를 데려갔다. 치과가 아니었다. 그냥 시골 가정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불법으로 치아 보철을 해주는 집이었다. 무면허 의료행위였던 것이다. 하긴 깨진 머리 치료도 무면허 의료로 받았으니 치아라고 달랐을까.


한 쇼핑몰에서 팔고 있는 줄칼. 이렇게 생겼다.


그런데 그때의 치료는 나에게 치과에 대한 평생 공포증을 만들어주었다. 마취도 없었고 요즘 치과처럼 호스로 입안에 물을 뿌리거나 타액을 빼내는 보조기구도 없었다. 목수들이 쓰는 기다란 줄칼로 생니를 무지막지하게 갈았고, 본을 떴고, 나중에 브릿지로 하여 걸었다. 지금도 줄칼로 생니를 갈아대는 그 소리와 통증이 기억날 정도다. 금니는 아니었고 '산뿌라'라는 재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때문에 치과 공포증은 물론이고 치아는 나중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까지 계속 내 콤플렉스였다. 크게 웃지도 못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활짝 웃는 사람이 부러웠고, 그런 이성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어릴 때 했던 보철과 브릿지는 결혼 전에 내가 번 돈으로 정식 치과에서 다시 해 넣었다. 그때 틈이 벌어진 앞니도 교정을 했다.


그런데 나이 40이 넘으니 잇몸이 슬슬 나빠지지 시작했다. 찬물이나 과일을 먹을 때 이가 시린 것이다.  아리기도했다. 한 번은 진통제를 사러 약국에 갔다. "이가 아립니다. 진통제 좀 주세요."


그러자 약사가 말했다. "이가 아린 겁니까? 잇몸이 아린 겁니까?"


아하! 그랬다. 이가 아린 건 충치가 생겼을 때다. 지금은 잇몸이 붓고 아린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 잇몸이 나빠져가고 있다는 걸 자각하기 시작했다. 40대 중반이 넘어가니 잇몸은 더욱 나빠졌다. 어쩔 수 없이 치과에 다니기 시작했고, 지난 몇 년 동안 잇몸 치료와 치석 제거, 발치를 해왔다. 잇몸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도 여러 번 마취를 하고 잇몸을 헤집는 경험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통해 임플란트를 심는 오늘까지 온 것이다.


치아는 정말 중요하다. 먹어야 살고, 먹으려면 음식을 씹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가 건강하지 못하면 그게 어렵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을 씹는 것 또한 삶에서 큰 재미의 하나인데 그걸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치아는 건강할 때부터 잘 관리해야 한단다. 나중에 잇몸 내려 앉고 빠지고 난 뒤 후회하면 고통은 고통대로 당하고 돈은 돈대로 들게 된다.


☞추가한다 : 큰 통증은 없었지만 약간의 두통과 함께 마취가 풀릴 때의 통증도 약간은 있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밤에 잠을 설쳤다. 2~3시간마다 잠이 깨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다른 꿈을 꿨다. 뒤숭숭한 꿈이었다. 평소 관계가 좋았던 사람과 갑자기 틀어지는 꿈, 평소 소원했던 사람이 갑자기 친해지는 꿈,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오기도 했다.


다음날 경과를 보기 위해 치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잠은 잘 잤나요?"

"네. 그런대로."

"혹 악몽은 꾸지 않았나요?"

"아. 뒤숭숭한 꿈을 꾸었어요."

"흐흐흐."


그렇게 경과 확인까지 받은 후 사무실에 출근했다. 그러나 도저히 일을 손에 잡을 수 없었다.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아렸다. 시술하는 동안 내 몸(입안이지만)에 가해진 극도의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온몸으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가 정신없이 낮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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